ADVERTISEMENT

세기말 암담한 가족의 초상-영화 '해피엔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영화 '해피엔드' 의 제목은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결말은 행복하지 못한 데 제목은 행복하게 끝난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해피엔딩' 을 금과옥조로 삼는 숱한 할리우드 영화를 본떠 돈을 챙겨보자는 제작자의 속셈인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런 역설을 통해 모순덩어리 같은 인간관계, 부부관계를 조명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행복을 희망한다. 이를 다루는 감독의 손길은 솔직하고 대담한 면이 있어 많은 논쟁을 예고한다.

'쉬리' 의 앤티히어로 최민식과 풋풋한 이미지의 전도연이 주연한 '해피엔드' 는 세기말 한 가정의 풍속도다. 사회구성의 최소 단위인 가정을 중심에 놓고, 행복 대신 균열의 과정 쪽에 포거스를 맞췄다. 그 파국의 끝이 살인이라는 데 충격과 당혹감이 교차한다.

실직 가장 서민기(최민식)는 자식과 아내에 충실한 이 시대의 평범한 남편상이다. 남편 대신 돈을 벌러 나가는 영어학원 원장인 아내 최보라(전도연)를 위해 밥짓고 빨래하고 청소도 하며 '외조' 를 마다 않는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아내의 불륜이 목격된다. 아내의 정부는 그녀의 대학동창인 웹디자이너 김일범(주진모)이다. 둘은 수시로 만나 질펀한 섹스를 벌이며 옛 추억을 반추한다. 김일범의 10년 된 사진첩에는 둘이 그렸던 젊은 날의 초상들이 빽빽이 박혀있다.

영화는 전후반을 양분해 이 비운의 삼각관계를 극명한 톤으로 보여준다. 아내와 정부의 불륜을 다룬 전반이 지나면 이어 남편의 복수극이 준비돼 있다.

아기에게 수면제를 탄 우유를 먹여 재운 뒤 늦은 밤 정부를 찾아나서는 아내의 도발이 반전의 기폭제가 된다. 이를 계기로 남편은 살의를 품고 정부에게 누명을 씌워 아내를 처단하는 완전범죄를 계획한다. 이성을 잃은 '치정극' 의 전말은 이렇다.

이런 전개과정을 보면 이 영화의 노림수는 쉽게 간파된다. 멜로와 스릴러의 '장르혼합' 을 통해 여러 취향의 관객을 두루 잡아보자는 상업영화적 호기심이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전략 차원으로 보기엔 영화가 보여주는 메시지의 의미가 크다. '경제권' 을 매개로 변화하는 가부장제의 붕괴라든가 실업으로 인한 가족 해체 등 사회현실의 묘사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 하지만 살인이라는 너무나도 간편한 방식으로 부부관계의 단절을 이야기 하려다 대화로 해결할 가능성을 아예 막아 버린 것은 이 영화의 숙명이자 한계다.

'내 마음의 풍금' 의 숫처녀 홍연을 떠올리는 관객들에게 전도연의 변신 연기는 기립박수를 받을 만큼 훌륭하다. 초반에 정부와 벌이는 4분여의 농염한 정사장면 등은 그녀의 진가를 더욱 빛나게 하는 대목. 배우란 본분보다 CF의 고액 몸값에다 이미지 손상을 우려해 영화에서 꼭 필요한데도 '벗는 연기' 를 거부하는 여배우들의 관습을 깬 파격만으로도 그녀는 칭찬 감이다.

반면 최민식의 연기는 외형상 부담스런 이미지를 탈피하지 못한 채 역할 자체에 묻혀버려 아쉽다.

단편영화 판에서 잔뼈가 굵은 정지우(31) 감독은 이번 데뷔작을 통해 범상치 않은 실력을 보였다.

그는 이미 단편 '생강' 에서 노동운동하는 부부의 일상과 소외를 날카롭게 그렸던 솜씨를 '큰 물' 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사물에 대한 예리한 관찰을 통해 사건의 추이를 설명해가는 능력은 이미 대여섯 편을 거뜬히 만들어낸 중견들보다도 뛰어나다.

이로 인해 '해피엔드' 는 자칫 어설플 수 있는 장르복합영화에서 새 천년 초반을 장식할 새 형식의 영화로 '격상' 될 이유 하나를 갖게 됐다. 11일 개봉.

정재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