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역사는 곧 세기말의 역사 … 힐렐 슈바르츠 교수 '세기의 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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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새 천년.밀레니엄.세기말…. 9와 0의 뒤바뀜인 세기말과 밀레니엄에 이렇게 누구나 설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밀레니엄 연구소 소장이자 미 캘리포니아대 객원교수인 힐렐 슈바르츠(역사학)가 쓴 '세기의 문' (이은희 옮김.아카데미북.1만2천원)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세기말의 양상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책이다. 다시말해 '매일 밀레니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 자체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는 사람' 을 위한 고급 안내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세기말의 공통된 성격을 제시하는 '독자들을 위한 가이드' 로 시작하며 세기말은 현재만이 겪는 혼란이 아니니 가빠지는 호흡을 진정시키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세기말의 역사적 공통점은 바로 불안과 희망이 교차한 야누스적 특징을 갖는다는 것. 그 한 축에 위치한 비관적 정조가 ▶종말에 대한 혼란 ▶극기.우울.퇴폐 ▶유토피아의 상실로 나타났다. 반면 낙관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 ▶혼란에 빠진 종말을 회복시키려는 노력 ▶전력 질주 등으로 개념화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세기말 이 두 경향의 치열한 밀고 당김은 인류의 역사를 뒤바꿨다고 파악한다.즉 인류의 역사는 '세기말의 역사' 라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1096년 십자군 창설, 1390년대 페스트 창궐, 1492년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1588년 스페인 함대 침몰,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등은 세기말의 사건이 세상을 뒤바꾼 전형적인 사례다.

저자의 관심은 동시대인 1990년대로 모아진다.이것은 999년에서 1901년까지를 하나의 모듬으로 묶고, 1990년대를 그에 상응하는 독립된 장으로 엮은 데서도 알 수 있다.

슈바르츠는 "금세기 세기말의 분위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강력하다" 고 말한다. 다름 아닌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20세기의 모습은 이전까지 세기말이 보여준 비관을 더욱 구체화시키며 극단으로 몰고가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오염.금융위기.자원고갈 등은 금세기말을 비관의 색조로 물들이고 있다.

하지만 슈바르츠의 결론은 "역사적으로 세기말은 항상 희극으로 끝났다" 는 것. 세기말의 불안에 대한 격정이 희극으로 끝나는 것은 그 강도만큼의 극복 노력이 있었기 때문. 따라서 이는 금세기에도 적용되며 다만 조금 더 어려울 뿐이라는 얘기다.

이 책은 서양의 중세와 현대를 넘나드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에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돼 읽기에 녹록치는 않지만 그것이 새로운 세기와 밀레니엄에 대한 부푼 희망을 꺾을 수는 없다.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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