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글로벌포커스] 젊은 유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유럽에서 벨기에처럼 정치구조가 복잡한 나라도 드물 것 같다. 프랑스어를 쓰는 왈롱 언어권과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플라망 언어권의 고질적 갈등이 정치구조에 그대로 투영돼 있는 탓이다.

인구가 서울시 주민 수에도 못미치는 작은 나라지만 한 정당에 프랑스어계 당수와 네덜란드어계 당수가 따로 있다. 경상도 당수에 전라도 당수가 있는 격이다. 같은 노선을 내건 정당이라도 언어권별로 독자 정당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지역별로 이해기반이 다르다는 것이다.

다이옥신 파동이 한창이던 지난 6월 실시된 벨기에 총선은 '무지개 연정' 을 탄생시켰다. 외형상으로는 자유당.사회당.녹색당의 청.적.녹 3색 연정이지만 속을 뜯어보면 훨씬 복잡하다. 네덜란드어계 자유당인 자유진보당과 프랑스어계 자유당인 혁신자유당이 손을 잡았고 여기에 사회당과 녹색당의 프랑스어 계파와 네덜란드어 계파가 각각 힘을 보탰다.

무지개 연정은 정치도 무지개색으로 하고 있다. 기업정책은 자유주의, 노동정책은 사회주의, 환경정책은 녹색주의…이런 식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국리와 민복만 달성하면 되지 좌.우의 방향성이 무슨 문제냐는 논리다. 다만 '지방색 타파' 라는 명제에서는 확실한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왈롱이든 플라망이 한쪽에 치우치는 정치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프랑스어 계파 각료가 네덜란드어로 대중연설을 하고, 네덜란드어 계파 각료가 프랑스어로 국회답변을 하는 등 언어의 벽을 허무는 상징적 노력도 엿보이고 있다. 이전 정권과 다른 점이다.

신기루처럼 보였던 무지개 조합을 가능케 한 주역은 네덜란드어계 자유당 출신인 기 베르호프슈타트(46)총리다. 장발에 동그란 안경을 쓴 모습이 마치 빌 게이츠를 연상시키는 그는 아직도 꿈꾸는 대학생 같은 인상이다.

그는 벨기에의 고질병은 이념적 색채와 지방색이 뒤얽힌 복잡한 정치색에서 연유한다고 진단한다. 능력보다 정파간 나눠먹기로 임명된 고위공직자들의 정치색이 문제에 대한 신속하고 유기적인 대응을 어렵게 함으로써 행정이 취약성과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다이옥신 파동에 대한 '사후약방문' 식 대응도 여기에 원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변호사 출신으로 25세에 국회의원, 29세에 당수, 32세에 장관을 지낸 베르호프슈타트 총리는 동갑인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와 함께 '젊은 유럽' 을 상징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고의 유연성이다.

좌.우라는 도식적 구분으로는 현대사회의 다양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담아내기 어렵다. 세력화에 목적을 둔 정략적 결속이 봉착한 한계는 유럽 각국에서 진행 중인 정당의 핵분열 현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드골주의를 표방해온 프랑스 우파정당인 공화국연합(RPR)에서 프랑스연합(RPF)이 갈라져 나갔고, 프랑스민주동맹(UDF)에서 자유민주연맹(DL)이 분기됐다. 극우파인 국민전선(FN)도 두 쪽이 났다.

그런가 하면 사냥.낚시.자연.전통당(CPNT)이 출현, 급격히 세를 늘리면서 유럽의회에 진출하기도 했다. 모두 최근의 일이다.

정치적 결탁이 아닌 이해의 공존을 통한 정당간 연립은 다품종 소량 정치시대의 불가피한 선택이다. 거대정당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끝없는 변신을 통해 다양한 가치를 접목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다.

유연한 발상이 전제돼야 가능한 일이다. 냉전적 사고의 잔재에서 자유롭지 못한 구세대 정치인들에게서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길 기대한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젊은 정치' 는 그래서 피할 수 없는 시대의 요구로 보인다. 지난주말 이탈리아 피렌체에 모인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브라질 6개국 정상이 모임의 주제를 '진보적 국정' 으로 정한 것은 시사적이다.

티에리 몽브리알 프랑스국제관계연구소(IFRI)소장은 '정부' 라는 개념을 '국정' 이란 개념이 점점 대체해갈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라는 개념에 내포된 수직적 지도성이 '호모 인테르네투스' (homo internetus)로 대변되는 지식기반사회에서는 통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평적 유연이 강조된 국정이란 개념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좋은 국정(good governance)' 은 21세기 정치의 중심테마가 될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내년 4월이면 총선이다. 지지할 정당이 없다고 한탄만 할 게 아니라 '창당도 벤처' 라는 기분으로 이 땅의 뜻있는 젊은이들이 발벗고 정치에 뛰어들 것을 기대해 본다면 현실을 망각한 공허한 발상일까.

배명복 파리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