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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칼럼] 고문의 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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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말 되살리기조차 싫은 기억이다. 전두환(全斗煥)정권이 광주항쟁을 잠재우고 '불평.불만' 세력을 솎아내는 80년 말과 81년 5월. 나는 그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과 서빙고동 보안사 분실에 '끌려간' 적이 있다.

'남영동' 은 당시 도피 중인 친구를 숨겨준 죄로, '서빙고' 는 이른바 '한수산필화사건' 탓이다. '남영동' 은 비교적 쉽게 넘어갔다. 정작 괴로운 고문은 '서빙고' 때였다.

고문이 워낙 악랄해 내가 무슨 간첩죄에 몰린 줄로만 알았다. 발가벗긴 채 두평 남짓한 방에서 주먹이 솥뚜껑만한 청년의 주먹세례를 받았다. 한대 맞으면 머리가 뒷벽에 부딪쳐 퉁겨나오면 주먹, 또 주먹. 다시 꿇어앉으란다. 다리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넓적다리를 낡아빠진 고무신짝으로 때리기 시작한다.

실핏줄이 터지고 부풀어 오른다. 그 위를 군화로 짓이긴다. 군 작업복을 입힌다. 아! 이제 끝났는가. 다음 방으로 옮겨진다. 의자에 앉힌다. 얼굴에 수건을 덮는다. 얼굴을 젖힌 채 주전자의 물을 콧구멍에 들이붓는다. 참나무 몽둥이가 어깻죽지에 내려꽂힌다.

"너 전두환이 이주일 닮았다고 했지. " 내가 그랬던가. 에라 모르겠다. "네. " "너 김일성 동생이지. " 아! 이건 아니다. 여기에 넘어가면 정말 간첩이 된다. "아니오. " 물-방망이가 거듭된다.

손가락에 전선을 감고 무전기통 같은 것을 돌린다. 손발이 저려온다. 눈망울이 튀어나오는 통증, 다시 물.참나무 방망이…. 결국 나는 '김일성의 동생' 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후 나는 잠을 자다 벌떡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모멸감이 끓어올랐다. 나를 끌고갔던 보안사 직원, '고문 담당자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었다. 점차 잊어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들은 고문기술자일 뿐이다. 고문 지시의 버튼을 누른 군사독재.폭력기제(機制)를 동원해야만 존립가능한 정치 폭력배들에 의한 똑같은 피해자라고 정리했다.

그리고 폭력기제의 청산을 위한 작은 노력이나마 좀팽이 같은 한 언론인에게 남은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서경원(徐敬元)씨 사건 재수사가 난마 같은 정국에 또하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고문에 의해 DJ에게 1만달러 전달 진술을 강요받았는지 여부가 재수사의 관심사다.

내 개인적 심증이지만 徐씨 또한 고문을 받았을지 모르고 강압에 의해 수사관의 요구대로 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도 세상의 눈초리는 간첩형을 받고 나온 자가 지금 와서 무슨 고문, 통일운동가 운운 하느냐며 힐난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적어도 고문실 문턱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그렇게 비난만 할 수 없다. 간첩이라 한들 고문받은 사실이 있다면 그런 반문명적 죄악은 고발되고 고쳐져야 한다.

대통령도 인간이다. 군사압제 시절 숱한 고초와 생명을 위협받는 고비를 넘긴 분으로 억울하고 분통터질 일이 한두건이겠는가. 받은 적도 없는 북의 돈을 동료 의원이 고문에 의해 줬다고 했다면 정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일 게다. 여기에 '두 손을 싹싹 빌어' 죄를 사면받았다는 대목에 이르면 피가 곤두설 지경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직 대통령의 1만달러 수수 여부를 재수사를 통해 밝히려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법과 질서를 지키는 최고의 책임자다. 10년 전 법의 판결도 무시하거나 무효화할 수 없는 법의 수호자다. 또 당시 국정 최고책임자였던 대통령을 과거 청산차원에서 사면(赦免)했다.

지금 와서 구판결을 무효 또는 백지화했을 때 지금의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검찰.사법부가 모조리 불신을 받는다. 이는 구법 수호자의 불신인 동시에 현재 법 수호자의 불신을 함께 몰고오는 참담한 결과가 된다.

둘째, 당시 1만달러 수수건은 기소는 됐지만 검찰 스스로 공소취소를 함으로써 원인무효가 된 것이다. 원인무효된 사안을 두고 결백을 따진다면 대통령의 권한남용에 속할 것이다.

여기에 대통령선거를 통해 김대중 후보의 색깔은 이미 검증됐다. 더이상 결백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

셋째, 과거에 대한 보복으로 비춰지면서 보복이 보복을 낳는 악순환의 고리를 연결한다. 우리 정치현실에서 이보다 더 무서운 재앙은 없다. 정통성.도덕성면에서 金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우월성을 확보하고 있다.

金대통령이 척박한 우리 정치풍토에 내릴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은 보복 아닌 화해, 분열 아닌 화합이다.

군사독재 시절 최대의 고문 피해자라 할 김근태(金槿泰)의원은 말했다. "이근안 경감은 고문의 가해자이면서 결과적으로는 어두웠던 군사독재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지난 고문사건의 진상을 고백하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한 다음 나에게 화해의 용서를 청한다면, 그 손을 맞잡을 용의가 있다" . 고문의 끝은 진상고백, 그리고 화해와 용서다. 과거 불문 선언' 이 그래서 시급하다.

권영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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