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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병욱칼럼] "모든 사람이 늘 속을 순 없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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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고관부인 옷로비사건이 단순한 불법.부도덕한 사건에서 조직적인 축소.은폐조작의혹으로 확대되고 있다. 꼭 지난 87년의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사건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그해 1월 15일 중앙일보의 특종으로 세상에 알려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은 4개월 남짓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과 동아일보의 심층보도로 고문치사범인 축소.은폐조작사건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결국 당시 개헌정국의 물길을 바꾸는 6.10항쟁과 6.29선언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필자는 이 사건과 관련해 1월과 5월 두 편의 칼럼을 쓰면서 양파도둑 얘기를 소개했던 기억이 있다. 양파를 훔치려다 잡힌 도둑이 양파 1백개를 먹거나, 곤장 1백대를 맞거나, 은화 1백개를 물라는 판결을 받고 양파도 먹어보다, 또 매도 맞아보다 결국 은화를 속전(贖錢)으로 내고 풀려났다는 얘기다. 처음부터 속전을 냈으면 됐을 일을 돈 아까워하다가 애꿎게 양파도 먹고 매도 맞는 고통만 더 당한 것이다.

큰일은 이미 저질렀으니 얼버무리거나 은폐할 생각을 말고 진실을 밝히고 사죄하는 게 그나마 부담을 덜고 살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당시 권력은 그러한 권고를 무시하고 범인을 축소.은폐하려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막을 일로 확대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고급옷 로비사건도 특별검사팀의 수사에 의해 많은 국민들이 의심했던 대로 축소.은폐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상황에서 고위공직자 부인들이 고급의상점에 몰려다니며 흥청망청대는 것은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이다. 검찰총수부인이 피의자측의 로비에 걸려 고급옷을 받으려 했거나, 장관부인이 중개했다면 범죄행위가 될 수 있다. 또한 이런 고위공직자 사회의 분위기를 바로잡지 못한 정부도 도의적.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정권에도 큰 부담이 될 것이다. 다만 정부가 상당한 부담을 무릅쓰고 진상을 철저히 밝혀 정치적.도의적.법적 책임을 물었다면 우선은 부담스럽더라도 그 부담은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특검팀의 조사로는 문제의 여자들이 서로 짜맞추기.거짓말행진을 했을 뿐 아니라 검찰 등 수사기관마저 축소.은폐에 한몫 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의상실 여주인이 문제의 호피무늬 반코트를 보낸 날이 12월 19일이라고 진술했더니 검찰에서 나라를 위해 26일로 하자고 했다는 것이 무슨 얘기인가. 검찰총장부인이 통일부장관부인에게 사직통팀이 내사한 문건을 전달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 수사당국이 당시 검찰총장부인의 뇌물 '영득(領得)의사' 를 희석시키려 했다는 의혹을 지우기 어렵다.

고급옷 로비사건이 축소.은폐의혹으로 그 성격이 바뀐다는 것은 개인의 불법.부도덕이 권력기관의 부도덕으로 비화한다는 뜻이다. 매우 심각한 사태다. 닉슨 미국 대통령의 도중하차를 가져온 워터게이트사건의 본질은 민주당선거본부를 도청하려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을 은폐하려 한 데 있었음에 유의해야 한다.

문일현(文日鉉)언론탄압 문건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에 대해서도 강한 여론의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문건파동의 핵심은 그 문건이 그 내용과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는 현실에 실제로 활용됐느냐 여부인데 검찰수사는 그 근처엔 가지도 않고 초보단계에서 맴돌다 말았다. 관련자들의 진술만 있을 뿐 결정적 물증이 없어서라고 하지만 文기자가 문건을 보낸 이종찬(李鍾贊)씨 사무실과 집에 대한 압수수색도 않고, 문건작성 및 문건폭로 예고발언 전후 文기자가 수차례 장시간 통화한 당정 요인들에 대한 조사도 없었던 것을 보면 수사의지 없음을 호도하는 빈소리에 불과하다.

박종철사건과 옷로비사건만 봐도 진실은 덮는다고 덮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경원(徐敬元)사건 재수사를 통해서도 당시 검찰의 DJ모해수사진상이 드러나려 하고 있다. 드레퓌스 사건때 에밀 졸라의 경고처럼 "진실은 지하에 묻히면 폭발력을 쌓아간다." 문일현문건사건의 진실도 쉽게 파묻히지 않는다. 아무리 노트북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를 박박 지워도 그 하드 디스크를 통해 오고간 통신의 흔적은 어딘가에 남아 있게 마련이다. 나중에 터지면 폭발력만 커질 뿐이다.

여권은 옷로비사건을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하기로 했다고 한다. 기대해 보고 싶다. 언론문건사건도 덮으려 하지 말고 진실을 밝혀내는 정도(正道)로 접근하기 바란다. 링컨은 "모든 사람이 얼마 동안 속을 수는 있다. 또 몇 사람이 늘 속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늘 속을 수는 없다" 고 말했다. 이 시대 우리에게 주는 경구(警句)같다.

성병욱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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