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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1969-1999 한국과 독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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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69년 10월 서독에서는 빌리 브란트를 수반으로 하는 사회민주당과 자유민주당의 연립정부가 출범했다. 독일과 유럽의 전후사에 새로운 시대를 연 브란트 정부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무엇보다 동.서독 관계를 조정한 이른바 '도이칠란트폴리티크' (독일정책)에서 드러났다.

눈에 띄는 변화로는 브란트가 집권하자 49년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립이후 존속하던 통독성(統獨省:전독문제성)을 없애버리고 그 대신 양독성(兩獨省:독일내 관계성)이 신설됐다. 그것은 그때까지 서독이 대내외적으로 전독일을 단독 대표한다는 '할슈타인 독트린' 의 포기를 의미했고, 독일에 두개의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사실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법적인 차원에서도 인정한다는 것을 뜻했다.

눈에 띄지 않은 더 큰 변화는 49년 연방공화국 수립 이래 20년동안 모든 총리의 시정연설 때마다 구두선처럼 되풀이되던 '통일' 이란 낱말이 브란트 총리의 취임 첫 시정연설에서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브란트의 이같은 독일정책 및 동방정책은 한국의 대부분 정치인.정치학자들이 끈질기게도 오해하고 있는 것과 달리 서독의 '통일정책' 이 아니라 '비(非)통일정책' 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오해의 여지없는 분명한 언어로 대외적으로, 특히 동독.동유럽을 향해 선포했던 것이다.

나라만이 아니라 한 도시가 어느날 장벽의 구축으로 두동강이 난 베를린시의 시장으로 '분단' 의 아픔을 누구보다 사무치게 알고 있는 브란트였다. 게다가 서독에는 45년 이후 동독과 동유럽 각지에서 쫓겨나오고 도망쳐나온 4백만명의 실향민이 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한 현실에서 '예측가능한 미래' 에 독일통일은 불가능하며 '통일' 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평화' 이며 평화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분단의 '스테이터스.쿼' (현상)를 인정하고 양독관계를 정상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공언한다는 것은 유권자의 지지에 명운(命運)을 거는 지도자에게는 정치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도전이었다. 그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대 도전이다. 브란트가 그것을 해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브란트는 곧 '반(反)통일노선' '분단고착주의' , 심지어 모든 것을 포기.양보하는 '매국행위' 라는 비난과 반대에 봉착했다. 연정을 구성했던 자민당의 멘데 당수는 기민당으로 당적을 옮기고 심지어 사민당 의원 중에도 이탈자가 늘어났다. 마침내 72년 브란트 총리 불신임안이 국회에서 표결에 부쳐졌을 때엔 연정 출범 당시 18석이나 많았던 여당 의석수는 거의 야당과 맞먹는 궁지로까지 몰렸으나 겨우 두표의 야당 이탈표가 가까스로 브란트의 실각을 저지해 주었다.

지금은 통일독일의 국회의장이 된 볼프강 티어제는 당시 독문학자로 동베를린에 살면서 수많은 동독시민과 함께 브란트 불신임안이 통과될까봐 떨고 있었다고 서울에 와서 나에게 술회한 바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브란트의 불신임안이 부결됐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는 수많은 동독시민이 베를린의 장벽 뒤에서 '구제(救濟)의 환호성' 을 올렸다는 것이다. 69년 이후 동독시민들은 구두선처럼 '통일' 을 떠벌리지 않은 브란트야말로 장벽 뒤에서 고생하는 자기네들을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유일한 희망' 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69년 그때까지 있었던 통독성을 없애버리고 분별있는 정치가나 지식인들의 말이나 글에서 '통일' 의 레토릭을 없애버린 독일은 그로부터 20년후인 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이내 통일의 위업을 달성해 하나의 독일로 99년 세기말을 맞고 있다.

그에 반해 69년 그때까지 없었던 통일원을 신설해 여야와 관민,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자나깨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라고 온 국민이 합창하고 있는 한반도에선 분단상황은 굳어져만 가고 통일의 전망은 요원하기만 하다.

왜 그럴까? 정치수사학에서 통일의 허사(虛辭)를 단념할 수 있는 용기있는 정치가가 한국엔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욱 딱한 것은 한국의 지식인 사회다. 서독에선 69년 훨씬 이전부터 언론인 페터 벤더, 작가 귄터 그라스, 철학자 야스퍼스, 정치학자 에셴부르크, 교회지도자 샤프 등 진보적 지식인들이 정치가에 앞서 통일지상주의를 팽개치고 동방정책을 위한 정신적 정지작업을 해주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69년 이후 30년을 하루같이 통일지상주의를 소리높이 선서하는 것이 지식인, 특히 진보적 지식인의 '존재증명' 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모든 것에 '통일' 의 보자기를 씌우니 햇볕정책도, 포용정책도 제몫을 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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