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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In&Out 레저] 경마장으로 소풍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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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이 손짓한다. 도박을 권유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경마장은 분명 경마라는 사행성이 강한 경기가 진행되는 곳이지만, 그 안에는 경마와 전혀 관계없는 훌륭한 공원이 조성돼 있다. 너른 잔디밭과 시원한 분수, 인라인 스케이트와 자전거길, 원두막과 조랑말 시승 코너까지 웬만한 도심 공원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쾌적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경마와 관계없이 하루를 즐길 수 있는 곳, 이것이 경마장의 다른 얼굴이다. 지난주 토요일 경마장으로 봄 소풍을 떠난 이헌욱(38.변호사)씨 가족을 따라가 봤다.

10:00 '주로내 공원'으로

헌욱씨 가족이 과천 경마장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쯤. 이 주변에는 경마장과 서울랜드, 서울대공원 등이 밀집해 있어 어느 정도 길이 막힐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서울 상도동 집에서 이곳까지 걸린 시간은 35분 남짓. 실제 경마장 주변이 막히는 것은 주말 오후에 접어든 다음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지하철역이 경마장 입구에 붙어 있어 교통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정문을 들어서자 눈길을 끄는 것은 대형 말 조각. 그 옆으로 6층짜리 건물 두 동이 들어서 있다. 경마를 관람하는 관람대. 첫 경마가 시작하는 오전 11시30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사람들 상당수는 매표소를 지나 서둘러 관람대 쪽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헌욱씨 가족은 관람대 오른쪽으로 난 작은 지하통로로 향했다. 경주마들이 뛰는 경마트랙 안쪽에 만들어진 공원이어서 '주로내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입장료는 800원. 하지만 18세가 안 된 아이들은 무료다. 30여m 구간 서늘한 지하통로를 나서니 곧바로 잔디로 푸른 별천지가 펼쳐진다. 무려 4만 평이나 되는 공간이다. 처음엔 퍼블릭 골프장으로 쓰다 1991년부터 공원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10 : 30 말타보기

공원에는 이것저것 많은 것이 갖춰져 있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승마체험장. 아이들에게 말을 태워주는 곳이다. 조랑말 한 마리와 미니호스라는 더 작은 말 한 마리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타느냐고 묻자 신청대에서 이름을 쓰고 번호표만 받으면 된다고 한다. 헌욱씨는 재빨리 아들 장원(11)이와 딸 소영(6)이의 이름을 썼다. 조교가 말고삐를 끌고 도는 거리는 20m 남짓. 제주도에서 이미 조랑말을 타본 장원이는 심드렁한 표정이지만 처음 타보는 소영이는 제법 상기된 표정이다.

승마체험장 바로 옆 건물에는 경마 시뮬레이터가 있었다. 경주하는 말의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한 말 모형에 올라타 경주 모습을 담은 스크린을 보며 달리는 가상체험기 네 대가 준비돼 있다. 소영이는 유아용에, 장원이는 일반용에 올라탔다. 엄마 두창희씨는 소영이가 걱정되는 눈치지만 유아용이어서 그리 심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장원이는 조련사가 고삐를 쥐고 도는 조랑말보다 훨씬 실감나는 움직임에 신이 났다. 발 뒤꿈치로 말 배 부위를 차거나 손으로 엉덩이를 때리니 더 빨리 움직인다. 2분도 안 걸려 이미 장원이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배었다. 말에서 내려온 두 녀석 모두 "진짜 말보다 재밌어요"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주말 사람이 가장 몰리는 시간에도 시뮬레이터 쪽의 줄이 조랑말 쪽 줄보다 길다고 한다.

11:30 원두막에서 점심

소영이는 아무래도 승마체험장 앞에 있는 큼지막한 놀이터에 눈길이 간다. 잠깐 미끄럼틀과 그네, 시소를 타니 얼굴이 활짝 핀다. 이번엔 산책 코스. 벚나무 길을 따라 연못이 조성돼 있고 분수가 시원하게 물을 뿜는다. 한쪽엔 조류 동물원도 있다. 원앙.호로조.오골계.캐나다 기러기 등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와' 하는 함성이 들린다. 벌써 첫 경주가 시작했다. 트랙 건너편 관람대를 반쯤 채운 경마객들이 모두 일어서고 말들이 있는 힘껏 내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불과 30초쯤 지나자 함성과 탄식이 뒤섞인 소음은 잦아들고 주위는 다시 한적한 공원 분위기로 돌아갔다.

연못 주변으로는 2층짜리 원두막 20여 개가 둘러서 있다. 층마다 열 명은 충분히 쉴 수 있을 만큼 널찍한 공간이다. 헌욱씨 가족은 그중 한 채의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준비한 도시락을 먹는 시간. 이날 기온은 30도에 육박하는 여름 날씨였지만 물소리 요란한 그늘에 앉으니 바람이 시원했다. 도시락을 준비하지 않았어도 걱정은 없다. 입구부터 공원 안까지 곳곳에 위치한 매점에서 김밥 등 도시락을 판다. 가격은 5000~1만원 선. 주로내 공원으로 들어오는 지하통로 옆 직원식당도 일반에 개방한다.

13:00 인라인·자전거 대여 무료

공원에서는 인라인 스케이트와 자전거.돗자리.유모차 등을 무료로 빌려준다. 경마장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고 시민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목적에서 공원을 만든 데다 법률상 한국마사회는 마권 판매를 제외하고는 어떤 영리사업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헌욱씨 가족은 인라인 스케이트 두 세트와 보조바퀴가 달린 자전거 한 대를 빌렸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웬걸, 배낭에 헬멧과 무릎.손목.팔꿈치 보호대까지 함께 넣어준다. 장비 수준도 상당히 고급. 아빠는 장원이 앞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인라인 실력을 뽐냈다. '어! 상당한 수준인데' 하는 표정이 장원이 얼굴에 스친다. 하지만 앞으로 가는 것이 헌욱씨 실력의 한계. 돌다가 그만 넘어져 버렸다. 엄마와 함께 자전거를 타는 소영이도 신이 난 표정이다.

15:00 꽃마차 타고 집으로

그동안 몇 차례 함성이 일고 시간은 벌써 오후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있다면 최근 조성한 분수공원이나 마사박물관에 들러보는 것도 유익할 것 같다. 하지만 극심한 혼잡을 피하기 위해 마지막 경주가 끝나는 5시30분 전에 자리를 뜨기로 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주로내 공원을 빠져나온 헌욱씨 가족 앞에 나타난 것은 꽃마차. 노란 꽃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객차를 진짜 말이 끈다. 매표소에서 정문 앞 지하철 역까지 셔틀처럼 운행하지만 이곳을 찾은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놀이기구가 된다. 말 발굽이 또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귀족이 된 느낌에 한껏 취했다. 경마 없이 보낸 경마장의 하루가 뿌듯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과천=최현철 기자<chdck@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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