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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경영전략 한국 여자양궁에서 배워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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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경제연구원 한상완 상무

한국에도 세계 1등 상품이 있고, 세계 1등 기업이 있다. 그러나 많지는 않다. 세계 굴지의 핵심 경쟁력을 가진 제품과 기업이 적다는 얘기다. 2만불 시대를 열려면 개인이든 기업이든 이런 경쟁력이 최우선이다. 1등이 경쟁자를 압도하는 비결이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이런 화두를 안고 현대경제연구원이 내놓은'한국 여자 양궁 신화와 기업 경영전략'이라는 연구 보고서가 화제다. 31일 경기도 용인의 연구원에서 보고서를 작성한 한상완 상무를 만났다.

한 상무는 "한국의 여자 양궁은 세계적인 '히트 상품'인데 그 성공 비결이 궁금했습니다"라며 연구 동기를 밝혔다. 최초로 출전한 1984년의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서부터 이번 아테네 올림픽까지 20년 동안 여자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모두 석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해외 언론에선 '한민족에게 활을 잘 쏘는 DNA라도 있는 것 아니냐'며 부러워하지만 양궁 팀의 업적이 공짜로 만들어진건 아니지요. 부단한 노력과 치밀한 전략이 성공 신화의 밑바탕에 깔려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먼저 질문을 했다. "삼성전자처럼 세계 1등 제품을 만드는 기업들이 한국에도 있지요. 그러나 이런 기업들이 몇 개나 되는지 아세요?". 이어서 한 상무는 "별로 없습니다. 전에 무역협회에서 만든 자료를 봤더니 한국엔 세계 1등을 하는 상품이 77개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미국의 800여개, 중국의 700여개에 비하면 아직 멀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20년 이상 세계 1등을 한 상품이나 기업은 없다고 했다. 삼성전자의 1등도 얼마 안 된 일이다.

1등 제품을 많이 내놓는 게 곧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경쟁력있는 기업들이 많아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한 상무는 "한국 경제와 기업들은 중국에도 밀릴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 경제잡지 포천의 글로벌 500대 기업에서 중국 기업 수는 지난해 15개로 한국의 11개를 제쳤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동안 정상을 지킨 여자 양궁의 비결을 해부해 보면 좋은 시사점을 얻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스포츠나 기업이나 1등이 되기 위한 조건은 일맥상통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분석 도구로는 미국 경영학자인 마이클 포터의 '다이아몬드' 모델을 사용했다. 다이아몬드 이론이란 ①생산요소여건(사람.기술) ②연관.지원산업(정책.제도) ③전략 구조 경쟁메커니즘 ④수요 여건 등 4개의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한 상무가 얻은 결론은 이렇다.

① 생산 요소 :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을 골랐다. 정적이면서 손으로 하는 것을 잘한다. 동양권 정신문화 때문이다. 양궁은 나와의 싸움이다. 차분하게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데 한국식 정신수양법이 도움이 됐다는 얘기다. 또 20년 동안 1등을 달리며 세계 최고 수준의 코치진과 선수층을 축적해 왔다. 외국 선수가 하루 100발 연습할 때 우리는 500발씩 쏘는 살인적인 연습량도 중요한 요인이다.

② 연관 지원 산업 : 선수를 발굴하고 검증하는 양궁 대회를 많이 열고 있다. 또 과학화를 위해 시신경감응측정기와 슈팅머신 같은 걸 개발해 훈련에 썼다. 스포츠과학기술 연구소를 통한 시뮬레이션 훈련은 실전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경기를 하는데 도움을 줬다. 기업으로 치자면 치열한 '연구개발(R&D)'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여자 양궁도 있었다는 말이다.

③ 전략 구조 경쟁 메커니즘 : 철저한 엘리트 스포츠 정책으로 양궁에서 '핵심인재'들을 키웠다. 그리고 이들을 경쟁에 붙였다. 한국 대표팀에 선발되는 게 올림픽에서 메달 따는 것보다 어렵다는 소리가 나왔을 정도다. 한국 80위가 세계 5위와 비슷한 실력이라고 한다.

또 시장을 지배하고 선도해 온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일단 1등은 한번 해 보는 게 중요하다. 남을 벤치마킹하다가는 평생가야 2등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1등은 피곤하다. 끊임없이 혁신하고 변화해야 2등이 못 따라온다. 다른 나라 양궁팀은 '한국 따라하기' 전략에 몰두했다. 그동안 한국 팀은 새로운 훈련법을 개발해 선두 지위를 놔주지 않았다.

④수요 측면 : 비인기 종목은 일반적으로 크기가 어렵다. 제대로 된 연습장도 없는 경우가 많다. 양궁도 올림픽에만 반짝 조명을 받는다. 다만 이런 여건 아래서는 성공하기가 어려운 데 양궁은 좋은 결과를 얻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한 상무는 먼저 "잘하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고 말했다. 동양인의 신체적 조건 때문에 육상이나 수영에서 아무래도 밀릴 수밖에 없다면 양궁은 특유의 손재주와 집중력이 시너지를 만든 사례다.

결국 기업들도 '문어발식' 사업 확장보다는 핵심 역량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사업을 꼭 1개만 하라는 뜻은 아니다. 10개를 잘 할 수 있다면 10개를 다 해야 한다. 한 상무는 "못하는 것까지 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 우리 기업들도 구조조정을 하면서 많이 배웠지만 아직도 '집중의 지혜'가 더 필요한 것 같다고 한 상무는 강조했다.

이어 그는 "시장을 지배하고 표준을 선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고 말했다. 다른 기업들이나 상품들이 '추종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기업들은 투자를 안한다고 한다. R&D 없이는 성공하기 어려운데도 우리 기업들은'괜한데 돈 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것은 우리 기업들 외형이 너무 작은 탓도 있다. 매출의 몇 %를 연구개발 비용으로 쓴다고 해봐야 선진국 기업들에 비하면 몇 푼 안되기 때문이다.

"환경 변화에 위협받지 않는 핵심 역량도 갖춰야 하지요." 한국 양궁을 견제하기 위해 그랜트 피타, 바르셀로나 토너먼트 등 숱하게 경기 방식이 바뀌었음에도 여자 양궁은 1위를 지켰다. 이런 힘이 있어야 1등을 한다는 것이다. 한 상무는 "망하는 기업들은 여러 이유를 대지만 진정한 이유는 단 하나"라며 "핵심 역량이 없어서"라고 말했다.

"차세대 리더를 육성하고 세대 교체에 성공하라"는 것도 좋은 메시지다. 우리가 후임자를 키우고 자리를 내주는데 게으르다는 얘기다.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되겠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 상무는 "양궁 팀은 후발 주자 양성과 세대 교체에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서향순, 김수녕, 조윤정, 김경욱, 윤미진, 그리고 박성현 같은 새 얼굴들이 올림픽 때마다 각각 금메달을 갖고 왔다.

한 상무는 "내부의 적을 관리하는 것이야말로 선결 과제"라고 말했다. 많이 간과하는 부분이지만 1등을 했을 때 자만심에 빠지거나 변화를 거부하다가 2등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자 양궁 선수들은 집중력을 잃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성적에 연연해 하지 않는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선도적 지위를 뺏기는 가장 큰 적은 자신의 안에 있다는 얘기다.

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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