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불길한 만세삼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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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1927년 유럽 3대 중앙은행 총재들이 글로벌 불균형 해소를 동시에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떠오르는 신흥국 미국을 겨냥한 발언이다. “미국이 유럽을 상대로 막대한 무역흑자를 올리고, 금을 마구 긁어가 불균형이 심각하다.” 금본위제 고수에 목을 매는 유럽의 위기감은 대단했다. 그해 봄 잉글랜드은행의 몬태그 노먼 총재, 독일 라이히방크의 히얄마 샤흐트 총재, 프랑스 은행의 샤를 리스트 부총재 등 3명의 거룩한 순례자들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세계 경제학계의 거물들이었다. 그들은 미국의 귀에 대고 금리를 내리고 내수를 확대하라고 속삭였다. 뉴욕연방준비은행은 어쩔 도리 없이 재할인율을 낮추고 돈을 풀었다. 그 끝이 2년 뒤 끔찍한 대공황이었다.

85년 9월 22일 플라자 합의 때도 글로벌 불균형 해소가 화두였다. 쌍둥이 적자에 짓눌린 미국은 유럽과 손잡고 엔화의 평가절상을 압박했다. 물론 외교문서인 플라자 합의문에는 거친 표현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환율이 글로벌 불균형을 바로잡는 데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비(非)달러 통화들의 질서있는 재평가가 바람직하다’는 두 구절이 삽입됐을 뿐이다. 이 두 문장이 가져온 충격은 엄청났다. 사흘 연휴를 마친 도쿄시장에서 엔화 환율은 하루 만에 달러당 235엔에서 10% 가까이 추락했다. 1년 뒤 엔화 환율은 150엔대로 떨어져 거의 반 토막이 났다. 그 이후 거품 붕괴와 잃어버린 10년이 찾아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의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은 글로벌 불균형 해소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세계경제가 보다 균형있게 성장하고, 부채에 덜 의존하는 지속 가능한 경제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어디도 흠잡을 데 없는 근사한 표현이다. 문제는 여기에 ‘반드시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지가 숨어있다는 점이다. 세계 경제를 균형상태로 돌리기 위해 뼈를 바르고 근육을 찢는 외과적 수술이 필요하다는 섬찟한 논리가 숨어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글로벌 불균형 해소 과정은 언제나 충격적인 가격조정에서 출발한 것이 공통점이다. 이번에도 환율전쟁을 피하기는 어렵게 돼 있다. 그 전에 사전 정리작업으로 통상마찰의 포문을 여는 것도 교과서적 수순이다. 최근 미국의 행보에서 잘 짜인 시나리오대로 움직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주엔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수출주도형 아시아 국가들에 경고를 보냈다. 어제는 미 무역대표부(USTR)가 85년 이후 처음으로 대미 무역흑자국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불공정 교역 관행 조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어차피 다른 행성을 찾지 못하는 한 앞으로 세계경제 성장률은 한 단계 낮아질 수밖에 없다. 미국은 소비하고 아시아가 돈을 대는 구조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국제공조’라는 근사한 유행어도 별로 믿을 게 못 된다. 글로벌 위기를 맞아 서로 돕지 않는 것도 미친 짓이지만 국제공조에만 매달리면 비참해진다. 25년에 미국이 그랬고, 85년에는 일본이 그렇게 당했다. 앞으로의 상황이 별반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축소된 세계 시장을 놓고 겉으로 국제공조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절박한 환율·통상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추론이 훨씬 현실적으로 보인다.

내년의 G20 정상회의 유치는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렇다고 “국가 품격이 올라갔다”며 도취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G20 회의를 주도하고 경제위기를 제일 잘 극복한 게 언제 한국경제에 악재로 둔갑할지 모른다.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경제위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의 위기를 뒤치다꺼리하면 금세 또 다른 위기가 닥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G20 합의문에 못박은 것처럼 글로벌 불균형 해소는 이제 속도와 폭만 남았을 뿐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수출에 목을 맨 한국은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신세가 됐다. 지금은 만세삼창을 부르거나 기뻐할 때가 결코 아니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