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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반미강경파 득세 체첸전 협상에 쐐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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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모스크바〓김석환 특파원, 김정수 기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13일 체첸 반군에 대한 러시아군의 작전이 전환점에 들어섰다고 선언했다. 바로 전날 체첸 제2의 도시 구데르메스를 장악, 체첸의 항복을 눈앞에 두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체첸측과의 협상 가능성은 일말의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끝까지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다. 푸틴의 이같은 강경자세는 최근 되살아난 민족주의 세력과 군부의 든든한 뒷받침 때문이다.

미국 등 국제사회가 민간인 희생을 이유로 러시아의 체첸 공격을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러시아 내 대미(對美) 강경론자와 민족주의자들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고리 세르게예프 국방부장관은 12일 군부 지도자들과의 회의에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최근 전략적 요충지인 카스피해.중앙아시아.카프카스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며 "이는 러시아에 대한 중대한 도전" 이라고 말했다.

푸틴 총리도 12일 군 지도부를 상대로 한 연설에서 "미국은 러시아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며 "무기구매 등 가능한 한 모든 수단과 자원을 동원, 러시아군 전력 강화를 위해 노력하겠다" 고 밝혔다.

또 러시아의 군사전문주간지인 '네자비시모예 보엔노예 오보즈례니예' 는 최신호에서 러시아 장거리 항공대의 미하일 오파린 소장의 말을 인용, "핵 탑재가 가능한 장거리 폭격기들이 냉전종식 후 처음으로 베트남과 쿠바로 비행할 가능성이 있다" 고 보도했다.

러시아는 코소보 사태로 러시아 내 반미 감정이 고조됐던 올해 초 소련 붕괴 후 처음으로 러시아군 전략폭격기들을 알래스카와 노르웨이 영공에 근접시켜 서방을 경악시킨 바 있다.

특히 미 공화당의 존 매케인 등 미 대통령 후보들이 "러시아에 2주 정도의 시간을 준 뒤 체첸에 대한 군사행동을 중단하지 않으면 국제통화기금의 자금지원을 중단해야 한다" 고 말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러시아 젊은층과 야당 지식인들 사이에는 미국의 오만과 독선을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러시아 야블로코당의 한 의원은 "요즘 체첸 공격에 대해 조금이라도 반대 의견을 보이는 것은 비애국적이고 테러리즘에 소극적인 인물로 스스로 낙인찍는 행위" 라고 최근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같은 러시아 민족주의의 득세로 러-미 관계에 소련 붕괴 이후 최악의 냉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카네기재단 모스크바 분소의 니콜라이 페트로프 소장은 "러 지휘부의 이같은 발언은 냉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러시아가 소외되고 서방이 적으로 간주되는 '차가운 평화' 의 시작을 의미한다" 며 우려했다.

또 카프카스 지역의 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 등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들도 러시아 내 민족주의의 확산이 두려운 입장이다.

러시아로부터의 보다 완전한 독립을 위해 미국과 송유관 건설 합작.나토 가입 등을 추진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러시아가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지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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