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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투명정치' 새바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일본 의회가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 국회활성화법이 제정되고 관료들의 입김을 배제하기 위한 정부위원회 제도가 폐지된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10일 오후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 회의장. 처음 선보인 '여야 총재의 1대1 토론' 을 위해 자민당 총재인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가 링에 올랐다.

첫 상대는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민주당 대표. 하토야마가 "피자가 너무 커져 맛이 없어졌다" 고 물고늘어지자 오부치는 어물쩍 넘기면서 시간을 끌었다. 초읽기에 몰린 하토야마는 헌법개정.정치윤리 쪽을 파고들어 오부치를 사정없이 공격했다.

두 총재가 주고받은 질의응답 횟수는 30여차례. 토론은 TV로 생중계되기 때문에 총리나 야당 총재는 국정을 꿰고 있지 않으면 본인은 물론 당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기 십상이다.

야당은 질의서를 사전에 건네주지 않고 거꾸로 여당 총재도 상대방에게 되물을 수 있다. 영국하원의 하이라이트인 '질문시간' 을 본뜬 쌍방향 토론인 셈이다.

오부치는 하토야마와의 대결에서 제대로 '반격' 할 여유를 갖지 못했지만 일단 '무승부' 로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부치 총리는 그러나 후와 데쓰조(不破哲三)공산당 위원장과 도이 다카코(土井たか子)사민당 총재와의 1대1 대결에서는 코너에 몰렸다.

후와와 도이 두 총재는 일본정계에서 말 잘하기로 소문난 싸움꾼. 두사람이 차례로 1대1 대결에 나서 각각 원자력 안전문제를 따지고 들자 오부치는 몇차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제대로 답변준비를 못한 듯 떠듬거리기까지 했다. 그 순간 야당 의원석에서 일제히 야유가 터져나왔다.

오부치는 하루 전 2시간 동안 영국의회 토론비디오를 교과서 삼아 총리관저 핵심참모들과 함께 예행연습을 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하토야마 대표도 9일의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총재토론 준비에 몰두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재토론은 예정시간 40분을 훌쩍 넘길 만큼 치열한 혈전이 펼쳐졌다. 질문.답변은 초.재선의원에게 맡기고 거물정치인들은 의석 뒤편에 팔짱을 끼고 앉아 막후협상에 골몰하던 예전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일본 의회의 변화는 새로운 좌석배치에서도 읽을 수 있다. 정부 각료와 여야의석이 마주보던 데서 벗어나 연립여당과 야당이 마주보는 여-야 정치대결 구도로 바꾼 것이다. 의사당 한쪽을 차지했던 고위관료들의 자리는 밀려났다.

관료들이 의회답변을 할 수 있는 '정부위원회 제도' 를 폐지, 노회(老獪)한 관료들이 의원 사무실을 돌며 미리 질문지를 입수해 김빠진 답변을 내놓지 못하도록 차단한 것이다.

이에 따라 관료들이 써준 답변서를 읽어나가는 '대독(代讀)각료' 의 시대도 지나갔다. 대신 있으나마나하다는 이유로 한때 관청가의 '맹장(盲腸)' 으로 조롱받던 정무차관 직책은 '알짜' 가 됐다. 내실있는 답변을 듣기 위해 정무차관이 장관 대신 답변에 나설 수 있도록 제도화됐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지난달 정무차관 인사에서 자민.자유.공명당의 2~3선 정책통들이 대거 발탁됐다. 오부치 총리도 파벌간 나눠먹기식 인사를 배제하고 직접 정무차관들을 낙점했다. 무엇보다 야당의원들을 맞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본 관청가에서는 벌써 한숨소리가 새나오고 있다. 한때 일본 최고의 파워를 자랑했던 관료집단이 각료와 정무차관의 보좌직으로 떨어진 데 대한 불만이다.

관료들은 국회에 불려다니느라 귀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었던 예전을 그리워하고 있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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