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以言制言의 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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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문일현씨의 검찰 등장이 '언론장악 음모' 의 본질을 파헤치는 계기가 될 것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언론계와 시민단체의 관측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검찰 수사의 짜맞추기 의혹을 제기하는 한나라당의 시각은 그렇다치고, 일부 언론 보도가 곁가지 논쟁에 치중하고 있는 탓이다.

한국외국어대 정진석(언론학)교수는 "사건의 본질은 文씨의 문건이 권력층에 전달됐는지, 문건이 실천됐는지 여부를 가리는 일" 이라며 "그럼에도 일부 언론 보도가 본질규명에 맞추지 않고 곁가지로 흐르는 느낌" 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일부 언론은 文씨의 문건작성 과정에 중앙일보 간부를 지목하는 '제3의 인물' 개입설을 보도하는 데 안간힘을 썼다. 그중에는 중앙일보측이 文씨와 공모, 자작극(自作劇)을 꾸민 것처럼 쓴 저급 코미디 같은 기사도 있었다.

박지원(朴智元)문화관광부장관과 박준영(朴晙瑩)청와대 공보수석(언론탄압 시리즈), 김한길 정책기획수석(별장 탈법건축)이 중앙일보 기사와 관련해 최근 제기한 소송과 언론중재 문제도 그렇다.

김한길 수석 관련 기사가 중앙일보(10월 13일자)에 나갔을 때는 한 줄도 다루지 않은 일부 언론이 지금 와서 그들의 반론요구 기사는 크게 보도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난 10월 16일 청와대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가 집중 추궁됐지만 이들 언론은 묵살했다.

오후 8시부터 17일 0시40분까지 김중권(金重權)청와대 비서실장은 장시간 곤욕을 치르면서 "김한길 수석의 연예인 사모님이 빈번한 활동으로 계속 거주하기 어려웠던 사정을 잘 이해해 달라" 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온 국민의 관심인 이 대목에 대한 국정감사를 이들 언론은 아예 보도하지 않았다. '국민의 알 권리' 를 외면한 것이다.

그러면서 청와대 참모들의 반론보도는 크게 다루는 어처구니없는 불균형을 이들 언론이 어떻게 해명할지 궁금하다.

중앙일보가 이런 보도로 받고 있는 명예훼손 문제는 별도로 치더라도 이런 유의 기사들은 사건 초점을 분산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다.

물론 이들 언론은 소수다. 이제 언론장악 음모를 파헤치는 본질로 돌아갈 때다.

이제라도 '언론을 통해 언론을 장악하려는 정권의 이언제언(以言制言)' 함정에 우리 언론계가 빠졌다는 훗날의 비판을 듣지 말아야 한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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