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언론문건 '본체'파헤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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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나라당 조사단이 베이징(北京)에서 '언론문건' 의 작성자로 지목된 문일현(文日鉉)씨 주변에 관해 자체조사한 결과를 어제 발표했다.

文씨가 청와대내 지인(知人)들과 잦은 국제통화를 해왔다는 한나라당측 주장은 이번 사태를 새로운 국면으로 진전시킬 인화성(引火性)을 갖고 있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물론 우리는 청와대와 文씨의 관계에 대해 성급한 예단(豫斷)은 피하고자 한다. 국제통화 당사자로 거론된 청와대비서관들도 통화사실 자체를 부인하거나 고교동문으로서 으레 있는 안부전화를 받았을 뿐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한나라당이 제기한 의혹은 사태의 초점에 해당하는 부분을 문제삼았다는 점에서 더 깊숙이 알아볼 가치가 충분하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주요 신문사들을 길들여야 한다는 것이 언론문건의 요지인 만큼 文씨가 사전에 여권 인사들과 그럴 필요성에 대해 의논했는지, 또 구체적으로 실행에 착수했는지 여부를 말끔하게 석명(釋明)하는 것은 여(與)와 야(野) 모두를 위해 좋다.

정작 걱정되는 것은 여든 야든 어떤 주장이나 의혹이 제기되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대뜸 부인이나 반박부터 하고 보는 지금의 풍토다.

이래서야 실체적 진실 규명은 물건너 갈 수밖에 없고, 남을 것은 정치권의 총체적 직무유기에 대한 국민적 비난과 환멸뿐이다.

국민회의만 해도 어제 한나라당측 주장이 나온 뒤 곧바로 '근거도 없는 허위주장' '제2의 정형근식 정치공작' 이라고 받아쳤는데 제기된 의혹의 사실 여부라도 제대로 챙겨볼 여유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최근 문건파문은 자꾸 옆길로 새고 있었다. 몸통은 방치하고 곁가지만 다투어 건드리는 모양새다. 문건의 작성배경과 권력층에의 보고-활용 여부가 본질인데도 일부에서는 폭로과정의 문제점이나 기자의 금품수수 등에 관심을 집중하려는 기색마저 엿보였다.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나면 떼지어 모여 웅성대다가 다음날 다른 것이 나오면 또 그리로 몰려가는 식이다. 본질 이외의 것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사안이다.

중요한 당사자인 이종찬(李鍾贊)국민회의 부총재의 검찰진술도 본질에 접근하기는커녕 오히려 의혹을 증폭시키는 역할만 했다. 이른바 녹취록이나 '제3의 인물' 설(說) 같은 것이 있다면 공당(公黨)의 고위 당직자로서 전모를 툭 털어놓고 자기 입장을 천명할 일이지 무슨 카드라도 되는 양 말돌리기만 일삼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우리는 문건사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책은 드러난 모든 의혹에 대해 진상을 명백히 밝혀내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마침 文씨도 이번주 중 귀국하겠다는 의사를 검찰에 밝혔다. 중앙일보 탄압사태는 이제 중앙일보만의 문제가 아니라 언론사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이제 문건사태의 핵심 고리들이 서서히 부각되는 만큼 정치권도 '샛길' 작전에서 정도(正道)로 돌아와 의혹의 본체인 문일현-이종찬- '윗선' 과의 연결고리를 파헤쳐야 한다. 검찰수사나 국정조사의 초점이 여기에 모여야 한다.

중앙일보 또한 이 연결고리를 파헤치는 데 끝까지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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