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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부끄러움과 사건의 본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지난달 25일 국회에서 언론장악 문건이 정형근의원에 의해 폭로됐을 때 기자들과 독자들이 받았던 충격은 이만저만 한 게 아니었다.

지난 1백여일간 진행됐던 중앙일보 사태가 '언론탄압 시나리오' 에 따라 진행됐다는 흔적이 도처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이어 문건의 작성자가 중앙일보 휴직상태인 문일현씨고, 이를 건네받은 국민회의 이종찬 부총재측으로부터 문건을 입수해 鄭의원에 전달한 사람이 평화방송 이도준기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사자들은 "국민의 정부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한 일(文기자)" "특종을 취재했다는 욕심때문에…(李기자)" 등으로 해명하고 있지만 여기에 공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겉으로는 정론(正論)을 주장하면서, 권력 줄대기에 급급한 추악한 유착" 이라는 언론.시민단체, 일반독자의 분노와 통박이 이어지고 있다.

더구나 어떤 이유로든 이도준 기자가 1천만원의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와 출입처를 같이 했던 모든 기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또 文씨와 한솥밥을 먹은 본기자도 자괴(自愧)감에 마음 찢어지는 주말을 보내야 했다.

정치권과 건전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할 '기자윤리' 의 재정립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임을 절감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권력에 의한 언론 길들이기' 의 본질이 흐려져선 안될 듯 하다. 오히려 치열한 기자정신을 마비시키고 각 언론사를 흐물흐물하게 만들려는 '외부환경 정비' 의지는 역대 모든 정권이 갖고 있었으며, 현 정부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 주목돼야 한다.

이종찬 부총재가 과연 문건을 읽어 보지 않았는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재(再)가공 하진 않았는지, 최종적으로 주요 내용을 청와대에 건의하지 않았는지 등은 풀리지 않는 의혹들로 남아 있다.

실제로 '언론사주 전격 사법처리' '탈세조사 등 내사' , 모신문 간부의 자금수수 의혹 등 '언론인 비리 흘리기' 같이 현실로 나타난 조치들은 문건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검찰수사와 앞으로 이뤄질 국정조사가 이런 본질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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