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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읽기] 이성부 대표시집 '우리 앞이 모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가을이면 농부의 자식도 아니건만 풍년 소식을 바란다. 알곡이 그득한 볏단을 안고 서있는 농부 사진을 보겠구나, 일부러 기다리기도 하면서. 그러던 지난 9월, 태풍에 쓰러져 누운 벼라니!물에 잠긴 평야를 찍은 항공 사진은 참혹하기만 했다.

내가 세상에 잘못한 일들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도 하고, 당장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러 가야 한다는 조증(躁症)상태가 되기도 했다.

우리 농경민족의 후예들 누구에게나 '벼' 는 먹거리 곡식 이상의 의미가 있지만 내게 그것이 이렇게 조금 더 각별한 이유는 뭘까. 나는 이내 이성부 시인의 시를 떠올린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기대고 산다/햇살 따가와질수록/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벼는 가을 하늘에도/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바람 한 점에도/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벼가 떠나가며 바치는/이 넓디넓은 사랑/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이 피 묻은 그리움/이 넉넉한 힘. " (시 '벼' 전문)

그 며칠 후 서점에서 '이성부 대표시집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 (찾을모.5천5백원)를 만나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흥분한 일은 떠벌이지 않겠다. 남 보기엔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을 꿰고 엮어 신비로와하는 것이야말로 울증(鬱症)에 지친 내 마음의 유일한 발전(發電)이므로. 어쨌든 득의양양, 값을 치르고는 일부러 둘러가는 버스에 앉아 달디달게 시집을 읽었다.

"바다는 자랑하지 않는다/이미 모든 것을 알아 버렸다" 로 시작되는 '바다' , "밤이 한가지 키워주는 것은 불빛이다/우리도 아직 잠이 들면 안된다" 면서 내 마음의 어깨를 휙 돌려세우던 '밤' , "한낮에도 검은 울음 길게 내뿜는/벌판의 마음으로/그대는 끝끝내 저질렀는가 아니면/팔려갔는가 은(銀)서른 개에 무너지고 말았는가" 라는 귀절이 뭐든지 뉘우치게 만들었던 '누가 그대를 이토록 만들었는가' ….

되도록 가볍고 짧은 시로 꾸몄다는 시선집에는 내가 좋아하던 시들이 거진 다 들어 있었다. 그것도 70년대 끄트머리에 한 달은 족히 들고 다니던 '우리들의 양식' 표지에서 낯익은 그 육필로!

이성부 시인 약력

▶42년 광주출생

▶경희대 국문과

▶62년 '현대문학' 통해 등단

▶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우리들의 양식' 당선

▶69년 첫시집 '이성부시집' 이후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전야' '빈 산 뒤에 두고' 등 시집 펴냄

이상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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