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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정통성을 원한 장제스 중국 문화의 정수를 옮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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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 있는 장개석기념관

요즘 중국과 대만의 사이가 좋다. 각종 제한이 뒤따랐던 중국인의 대만 방문도 한결 수월해졌다. 대만 집권 국민당의 친중국 정책의 영향이다. 깃발을 앞세운 대륙인들의 행렬을 대만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대만을 방문하는 중국 대륙인들이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부러움을 이기지 못해 한숨을 쏟아내는 곳이 있다. 대만의 국립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다.

이곳에는 1948년 대륙에서 가져 온 약 24만 점의 유물이 있다. 송(宋)·원(元)·명(明)·청(淸) 4대 왕조를 거쳐 내려온 도자기, 서화, 책자를 비롯해 3000여 년 중국의 역사를 느껴볼 수 있는 세계적 골동품이 가득하다. 중국 대륙인은 이곳이 부럽기 짝이 없다. ‘다시 가져 갈 수만 있다면…’이라는 생각을 품을 정도다. 마치 제 혼(魂)을 빼앗긴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중국은 전통이 매우 깊다. 거대한 땅에서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자취들, 아마 그것을 물건으로 설명한다면 역사 유물이 딱 제격일 것이다.

중국 대륙에도 골동품이 부지기수다. 양으로 따지면 대만의 고궁박물원은 상대가 안 된다. 그러나 질로 따지자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품(精品) 중의 정품은 대만의 고궁박물원에 대부분 모여 있다. 특히 황궁에서 사용하던 각종 집기와 서책,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중국 서화의 대표작이 모인 곳은 대만이다. 대만 고궁박물원에서 발길을 멈추고서 뚫어져라 전시품을 바라보던 중국인들이 길고 긴 한숨을 내쉬는 이유다.

과거 중국의 찬란한 전통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모은 주인공은 장제스(蔣介石)다. 1900년대 초반 중국을 주름잡았던 당대의 권력자다. 국민당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장제스는 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과 패권을 다툰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정부패의 덫에 걸려 결국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대륙의 패권을 넘긴다.

지금의 쓰촨(四川) 지역 충칭(重慶)의 근거지에서 공산당의 막바지 공세에 힘겹게 버티던 장제스는 48년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전란을 피해 옮겨 왔던 베이징(北京) 고궁박물원의 유물들을 곧 자신이 도피할 대만으로 운반토록 한 것이다.

방대한 유물은 선박에 실려 대만의 지룽(基隆) 항구에 도착했다. 타이베이(臺北) 양밍산(陽明山) 기슭에 공습에도 견딜 만한 시설을 만들고 지어진 게 지금의 고궁박물원이다. 이곳을 들른 사람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경탄을 금치 못한다. 유물의 화려함, 방대한 물량 그리고 ‘도대체 어떤 노력을 기울여 이 많은 물건들을 옮겨 왔을까’라는 상념 때문이다.

아마 그 자신의 명운(命運)과 유물을 동일시하지 않는 한 이 같은 대규모 운반 작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방대한 유물이 곧 자신의 정체성을 대표한다는 일체감이 없이는 촌각을 다투는 패주의 상황에서 수많은 유물을 옮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군벌이 점령했던 베이징에 북벌(北伐)의 명분으로 장제스의 국민당이 발을 들여 놓은 것은 28년 6월이다. 국민당은 베이징 진주 직후 바로 ‘고궁박물원조직법’을 만들어 유물 보호에 나선다. 그러나 중국 북부 지역이 다시 전란에 휩싸이던 31년 국민당은 고궁박물원의 유품들을 제 근거지인 난징(南京) 옆 상하이(上海)로 옮긴다. 주지하다시피 그 다음에는 국민당이 일본의 공략, 공산당과의 내전으로 이곳저곳으로 근거지를 옮긴다. 유물도 국민당을 따라 여러 곳을 전전한다.

유물들은 마침내 상하이에서 대만의 지룽 항구로 세 차례에 걸쳐 도착한다. 모두 2972개의 박스에 담겨졌다. 원래 베이징에 있던 유물의 22%에 불과하지만 그 내용은 ‘정품 중의 정품’이다. 중국 3000여 년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청동기와 갑골문, 역대 유명 문인들의 서화, 황제의 도자기와 각종 집기들을 망라했다. 지금까지도 이 대만 고궁박물원의 유품을 제외하고서는 동양의 문명사를 제대로 그릴 수 없을 정도다.
제 조상이 남긴 유물을 소중하게 다루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장제스와 국민당이 보인 이 같은 집착은 아무리 따져 봐도 특별하다. 장제스 본인이 이에 대해 특별하게 설명을 한 적은 없다. 장제스는 ‘조상의 유물 보유=정통성 확보’라는 등식에 착안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 장에서는 옥새와 사슴, 그리고 용에 담긴 중국인들의 ‘축선 위의 사고(思考)’를 얘기했다. 중국 역사 속의 수많은 권력자들이 좇았던 옥새, 진(秦) 멸망 뒤 중원의 패권을 의미했던 사슴, 여러 동물의 생김새를 한데 모아 그려낸 용은 중국 최고 권력과 정통성의 상징이요 축선이다. 그 상징을 손에 넣고 축선 위에 올라서는 자만이 중국이라는 광대한 ‘천하(天下)’를 다스린다.

그러나 옥새는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고 사슴은 현대 중국의 상징에서 물러난 지 오래다. 용으로 그려지는 권력의 상징 또한 황권이 남아 있던 청(淸) 황실의 패망과 함께 사라졌다. 신해혁명 뒤 새 권력자로 떠오른 장제스가 그 대신 착안한 것은 중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생겨났던 수많은 유물들일 것이다.

장제스는 공산당에 패해 대만이라는 작은 섬으로 쫓겨 갔다. 그러나 그는 화려하고 장대한 중국 역사의 대표 상징, 고궁박물원의 유물을 손에 넣었다. 옥새와 사슴, 용이 대표했던 권력의 정통성을 유물로 대체한 것이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전통적인 베이징의 축선인 천안문에 마오의 거대한 초상화를 걸어둔 것처럼 그 또한 유물에서 권력의 축선을 찾았다. 그러나 축선은 권력자의 것만이 아니다. 중국 불교의 최대 공헌자인 선종 6대 조사 혜능(慧能)의 일화에서도 그 축선은 등장한다. 목면가사(木棉袈裟)의 스토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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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국제부·정치부·사회부 기자를 거쳐 2002년부터 5년 동안 베이징 특파원을 역임한 중국통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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