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만하 시인 30년만의 시집 '비는 수직으로…'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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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빈 하늘 환한 햇살이 지상의 외로운 것들 위로 스러지고 있다.

갈대꽃 허연 속살을 파고들며, 갈맷빛 물이랑을 찰싹찰싹 거리며, 우리들 깊은 마음 속 그리움을 잡힐듯 말듯 비추며 가을은 깊어가고 있다.

그 그리움을 향한 의지의 시집이 나왔다.

허만하(許萬夏.67)씨가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솔출판사)를 최근 펴냈다.

"연대기란 원래 없는 것이다. 짓밟히고 만 고유한 꿈의 목숨이 있었을 따름이다. 수직으로 드러낸 잘린 산자락의 속살처럼 부드러운 지층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총 저수면적 7.83평방킬로미터의 시퍼런 깊이에 잠긴 마을과 들녘은 보이지 않았으나 묻힌 야산 위 키 큰 한 그루 미루나무 가지 끝이 가을 햇살처럼 눈부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라져라, 사라져라, 흔적도 없이 정갈하개 사라져라. 시간의 기슭을 걷고 있는 나그네여. 애절한 목소리는 차오르는 수위에 묻혀가고 있다. "

아 ! 누구인가. 애달픈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바다를 향해 내걸었던 유치환 시인도 갔다.

노을에 젖는 가을 강물이 부글부글 끌어오르며, 아무것도 없는 창공을 그냥 날아 오르는 새며, 가을 햇살이 실린 장닭 꼬리에서 우리 꿈을 언뜻 보았던 박재삼.박남수, 그리고 박용래 시인들이 모두 우리 시대에서 사라졌다.

한 사람의 꿈을, 삶의 깊이를 밤하늘의 별똥별인양, 우주의 것인양, 영원한 것으로 각인시켜주고 떠난 시인들, 허만하씨의 시에는 그 지층들이 그대로 살아 있다.

57년 등단한 허씨는 69년 첫 시집 '해조(海潮)' 를 펴낸 이후 30년만에 이 시집을 펴냈다.

6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마음' 을 현대화 하자며 현대시동인으로 활동했던 시인들은 지금 문예지를 만들고 대학에서 시에 대해 강의하는등 문단 중심부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허씨는 그 동인이면서도 문단과는 멀리 떨어져 지금도 습작하듯 시의 에스프리를 붙잡고 있다.

해서 허씨의 시들은 시의 고향, 그 그리움을 향한 의지에 붙박혀 있다.

위 시 '지층' 전문에서 보이듯 이번 시집에는 정갈하게 사라지는 인간의 꿈, 그리움이 햇살처럼 눈부신 소리를 지르고 있다.

"슬픔의 깊이를 견디고 있는 하늘의 높이가 비친 바다의 물이랑 신록의 푸른 불꽃처럼 타는 그리움 마지막처럼 잔잔히 불러보는 그리운 이름 이름. 그리움은 물빛이 아니다 뜨거운 이마 가뭄에 갈라진 논밭처럼 튼 입술 그리움은 몸살이다 그리움은 슬픔처럼 아프다 아프다"

'내면의 바다' 일부에서 보듯 그리움은 아프다. 목말라 부르튼 입술처럼 아프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누구든 그런 그리움의 몸살을 앓고 있다.

결코 일회성이 될 수는 없는, 돌맹이, 피라미, 한송이 꽃의 사물이 아닌 인간의 자존, 그 깊이와 넓이를 위해 우리는 오늘도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바라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현실이란 닫힌 시공(時空)에 발을 내리고 있는 불구의 존재 인간, 결코 맏닿은 평행선이 될 수 없어 수직으로 서서 죽어야만 하는 그리움을 향한 우리의 상처가 허씨의 시에는 들어 있다.

"어설픈 사고와 감상과 대중적 푸닥거리와 쉬운 위안이 유행하는 시대에 있어서 이만큼 깊이 생각하고 끈질기게 생각하는 시인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

문학평론가 김우창씨의 이 시집에 대한 평이다 쉬운 위안만 찾는 시대, 허씨의 시는 우리 마음의 본향인 그리움을 아프게 각인하고 있다.

"나는 계속 변두리에 있고 싶습니다. 문단의 변방에 있으면서 중심에 편입되서는 안되는 인간의 자유, 정신적 자유의, 그 끝을 지키고 싶습니다. "

2년전 부산 고신대 의과대 병리학 교수를 정년 퇴임한 허씨는 이제 시대에 녹슬지않은 언어의 야생의 향기 속에 우리의 가없는 꿈을 담는 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부산=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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