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4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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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44. '브라운 각서'

66년 2월 23일 험프리 부통령은 朴대통령에게 '한국과 사전협의 없이 미-베트남 정상회담을 진행한 데' 대해 정중히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에이브럴 해리먼 전 소련주재 대사까지 대동하고 나선 것으로 보아 전투병력 추가 파병문제를 어떻게든 매듭 지으려는 미국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나는 먼저 험프리에게 선수를 쳤다. 미국으로서는 수용하기 곤란한 '한.미 방위조약 개정' 문제를 들고 나선 것이었다.

그러자 험프리는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으며 난색을 표시했다. 그무렵 반전(反戰)무드에 포위돼 있던 미 행정부 입장에서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할 방위조약 개정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때다' 싶어 나는 우리측이 줄곧 요구해 온 ^군장비 현대화 ^파월 한국군의 처우개선 문제 등을 거론했다.

험프리와의 협상에서 문제가 생길 때 마다 공동특사로 동행한 해리먼은 해결사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미국의 철도왕 가문출신의 억만 장자로 소련대사를 거쳐 68년 미.월맹간 파리회담의 미측 수석대표로 활약한 뒤 뉴욕 주지사를 역임한 미국의 '외교 해결사' 였다.

그의 유산으로 설립된 '해리먼 재단' 은 브루킹스 연구소, 컬럼비아대학, 미의회도서관 등의 자금 줄이기도 하다.

해리먼은 특히 1944년 루즈벨트 대통령 특사로 런던에 갔다가 처칠 수상의 며느리였던 파멜라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파멜라는 처칠의 외아들 랜돌프와 이혼한 뒤 70년 마침내 해리먼과 결혼에 골인했다. 파멜라는 그후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키우는 대모(代母)의 역할을 했고 클린턴은 그 보답으로 93년 그녀를 프랑스 대사로 임명했다.

지금도 해리먼 부부는 '세기의 연인' 으로 미국인의 가슴에 남아 있으며 파멜라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교계의 여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험프리가 망설일때마다 해리먼은 "한국은 파병을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명분을 찾고 있다. 먼저 한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신속한 파병에 절대적이다" 며 거들어 주곤 했다.

험프리는 주월 한국군의 전투수당을 인상하고 한국의 대(對)월남 수출품목을 2백여종으로 늘리는 등 대폭 양보를 했다. 이 때문에 65년 10월이후 50여차례나 질질 끌며 수렁에 빠져있던 나와 브라운 대사간의 협상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최대 관건은 역시 이를 문서화하는 문제였다. 나는 브라운에게 '그동안 합의사항을 문서화하지 못해 문제가 생겼다' 며 양국간 '협정 형식' 의 문서화를 요구했다.

그러자 브라운 대사는 '무슨 소리냐. 약속은 꼭 지킨다' 며 펄쩍 뛰었다. 우리는 문서화에 대미 외교의 사활(死活)을 걸다시피 했으며 미측도 존슨 대통령까지 나서 이 문제를 검토한 끝에 현지 대사의 각서로 마무리 하기로 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미측에서도 대단한 양보였다.

나는 66년 3월 7일 브라운 대사로부터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미국지원.참전에 따른 보상 등이 명시된 16개 항의 '브라운 각서' 를 넘겨 받았다.

이 각서는 그후 70년 미 상원(사이밍턴 청문회)에서 미정부를 곤경에 빠뜨린 빌미가 되기도 했다. 브라운 대사는 이 청문회에서 '한국측에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 며 의원들의 집중공격을 받았고 용병(傭兵)논쟁이 불꽃을 튀기기도 했다.

월남 파병은 부수적 이익도 얻었다. 김성은(金聖恩)국방장관은 주월 한국군에 소요되는 보급물자 수송선박이 월남에선 빈 배로 돌아오자 미국이 제공한 첨단무기를 미국 몰래 한국으로 실어오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군 현대화 뿐만 아니라 방위산업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나는 국방부의 이같은 불법 무기반입 사례를 들어 金장관에게 "당신 알고 봤더니 순 도둑놈(?)이더구만" 이라고 농담을 던졌더니 그도 질세라 "아니 당신도 미국과 협상하는 걸 보니 순 도둑놈 심보던데?" 하며 둘이 껄껄 웃던 기억이 새롭다.

이동원 전 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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