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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36>김광섭의 ‘성북동’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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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호 10면

시인 김광섭

1973년 1월 하순 서울 서소문의 명지대학 빌딩 15층 강당에서 열린 한국문인협회 정기총회. 오랫동안 병석에 있던 노시인 김광섭이 휠체어에 실린 채 회의장에 입장하자 참석한 700여 문인의 시선이 일제히 노시인에게 쏠렸다. 새 이사장 선거에 출마한 김동리와 조연현 간에 치열한 접전이 예상된 터여서 문단의 원로인 김광섭이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 하는 것도 물론 관심사였다. 그러나 노시인의 ‘한 표’가 어디로 가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건강상태였다. 햇수로 9년째 병석에 있던 김광섭은 병원에 드나드는 외에는 단 한 차례도 바깥나들이를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양식 있는 문인들은 68세의 병든 노인까지 동원하는 문단 선거전의 과열양상에 혀를 찼다.

김광섭은 65년 4월 22일 오후 서울운동장에서 자신이 재직하던 경희대와 고려대의 야구 경기를 관람하던 중 뇌졸중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기나긴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평소 고혈압 증세가 있어 조심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 전날 과음한 데다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의 응원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 경기장을 찾았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즉시 근처 메디컬센터로 옮겨졌으나 꽤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해 주변 사람들은 그가 그대로 세상을 떠나거나 깨어나더라도 정상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때 김광섭은 환갑을 5개월쯤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한 달쯤 후 김광섭은 기적처럼 깨어났다.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의식은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정신이 되돌아오고 행동이 얼마간 자유로워지자 그가 찾은 것은 필기구였다. 병석에서도 틈틈이 눈을 가다듬은 채 시상에 잠겼고, 뭔가 떠오르면 그것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병상 생활을 그렇게 꼬박 3년을 보낸 뒤 김광섭은 68년 봄 ‘월간문학’에 ‘성북동 비둘기’를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재개했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가슴에 금이 갔다/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성북동 비둘기’ 첫 연)

김광섭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시는 반세기에 걸친 그의 작품세계를 조망할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제치하의 초기 중기 작품과 해방 이후에 쓰인 그의 시편들이 서정성을 밑바닥에 깔면서 시대적 아픔과 고뇌를 짙게 내보이고 있다면, ‘성북동 비둘기’로부터 시작된 그 이후의 작품세계는 인간과 삶의 근원에 대한 향수를 아름답고 세련된 감각으로 읊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김광섭은 왜 오랜 투병 중에 이 시를 썼으며 그 소재가 하필이면 ‘성북동’과 ‘비둘기’였을까.

김광섭이 성북동 168번지 가파른 언덕 위에 대지 70평, 건평 40평의 이층 양옥을 지어 이사한 것은 61년이었다. 그때는 시에 나타나는 대로 그의 집 뒤에 채석장이 있었고, 비둘기 떼가 돌 깨는 소리에 놀라 이리저리 쫓기듯 날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의 김광섭은 자연이 속절없이 파괴되고 순수한 자연의 상징이랄 수 있는 비둘기 떼가 쫓겨다니는 그 애처로운 모습들에 눈길을 던질 만큼 한가롭지 못했다. 세계일보 사장에, ‘자유문학’ 발행인에, 경희대학 교수에, 거기다가 문학단체들에까지 간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김광섭은 한 시 잡지와의 대담에서 ‘성북동 비둘기’의 모티브를 이렇게 말했다. “오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성북동 집으로 돌아와 요양할 때 방안에 있는 게 갑갑하면 마당에 자리를 펴고 누워 사방을 둘러보곤 했지요. 따뜻한 바람이 불고 주변에는 꽃들이 만개해 있었어요. 하늘은 맑고 푸른데, 돌 깨는 소리에 놀라 쫓기듯 날아다니는 비둘기 떼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잊은 채 살아왔구나 싶었습니다.”

‘성북동 비둘기’는 그의 시 정신이 자연과 삶의 근원으로 회귀해 가는 전환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집안 형편상 70년대 초 성북동 집을 처분하고 아들의 집인 여의도의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그때 자신의 모습을 ‘새장에 갇힌 새’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나마 이웃에 구상 시인이 살고 있어 의지가 되었다. 김광섭은 77년 5월 23일 다시 뇌졸중이 악화돼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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