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택 살리기 위해 최측근부터 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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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한눈에 봐도 주름살이 부쩍 늘었다. 몸무게는 7~8㎏ 빠진 듯했다. 벤처신화의 주인공에서 부실기업 오너로 추락…. 팬택계열의 워크아웃으로 박병엽(47) 부회장이 입은 상처는 생각 보다 깊었던 모양이다. 2007년 3분기 후 9분기 연속 흑자행진을 이어가면서 부활의 날개를 펴고 있는 박 부회장은 “남아 있는 것은 독기뿐”이라며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워크아웃 기간을 묵묵히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10월16일 팬택 본사 19층에 위치한 부회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자본금 4000만원에 직원 6명으로 시작한 무선호출기 제조업체에서 연 매출 3조원 휴대폰 제조사로 변신. 창업 후 2005년까지 연 평균 50%가 넘는 성장률. 팬택은 벤처기업의 상징이었고, 박 부회장은 신화로 통했다. 이 회사의 성장 원동력은 흥미롭게도 미국 휴대폰 제조업체 모토롤라였다. 1998년 모토롤라는 1500만 달러를 팬택에 투자했고, 팬택은 이를 발판으로 고속성장의 활로를 열었다. 팬택이 휴대폰 사업에 뛰어든 1997년 이 회사의 매출은 762억원에 불과했지만 2000년엔 2871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불과 3년 만에 276% 성장한 셈이다. 박 부회장은 “모토롤라의 투자가 팬택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 공교롭게도 팬택의 신화가 산산이 깨진 것은 모토롤라 때문이다. 2006년 모토롤라의 히트상품 ‘레이저폰’에 직격탄을 맞으며 워크아웃 기업으로 전락했던 것. 팬택으로선 모토롤라 덕에 웃고, 모토롤라 탓에 운 셈이다. 박 부회장은 “당시 울다가, 웃다가, 또 울다가를 반복했다”며 “왜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06년 팬택의 적자는 무려 3391억원에 달했고, 2007년 상반기를 포함하면 5000억원 넘게 손해를 봤다. 박 부회장은 “모토롤라의 레이저폰이 그렇게 글로벌 휴대폰 시장을 쥐락펴락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예측 실패가 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내 또 다른 실책은 경영전략을 재빨리 조정했어야 하는데, 이마저도 타이밍을 놓였다”고 말했다. 박 부회장으로선 두개의 실책을 범한 셈이다.

하지만 그는 워크아웃이 개시된 직후 다시 심기일전했다. 일하는 방식, 생산하는 방식을 모두 뜯어고쳤다. 이전엔 극도로 꺼렸던 인적 구조조정도 가차없이 진행했다. 임원 70명을 먼저 내보냈다. 그 가운덴 워크아웃 개시를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었던 박 부회장의 오른팔, 왼팔도 포함도 있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단이었다. 그는 “내가 신임하는 사람을 정리하지 않으면 구조조정의 명분을 찾을 수 없다”며 “창업주가 시베리아 벌판에 홀로 섰구나는 비장함을 주지 않으면 안됐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읍참마속이었다.

박 부회장이 심혈을 기울인 것은 또 있다. 마인드 변화다. 명령과 지시에 의해서가 아닌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문화를 원했다. 그가 자율코드 정착을 얼마나 밀어붙였는지 엿볼 수 있는 사례 중 하나. 당시 박 부회장이 금기어로 지정한 게 있었다. 제출, 승인이었다. ‘경영계획 채권단 제출, 승인’이라는 문구만 보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박 부회장은 “경영계획은 우리가 달성하는 것”이라며 “누군가 의식하고, 의존하면 팬택의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박 부회장의 ‘자율경영’ 의지는 조직 전반에 퍼지고 있다. 팬택 직원들은 주말을 반납한지 오래다. 매주 토요일 적게는 300명, 많게는 1200명이 일한다. 매주 일요일에도 100명 안팎의 인원이 상시 근무한다. 자율경영이 조직을 관통한 덕분에 가능해진 일이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팬택의 실적은 날로 개선되고 있다. 팬택은 올 3분기 매출 5557억원, 영업이익 418억원을 올렸다. 2007년 3분기 이후 9분기 연속 영업흑자다. 올해 매출은 2조2000억원, 영업이익은 21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휴대전화 판매량도 2007년 750만대, 2008년 970만대 등으로 증가 추세다. 올해엔 1100만대가 팔릴 것으로 예상된다. 주목할 점은 팬택의 프리미엄 브랜드 스카이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 올해로 론칭 10년째를 맞은 스카이의 총 판매량은 1530만여대. 이 중 최근 3년간 판매된 수량은 740만대로, 전체의 48%에 이른다. ‘스카이는 마니아층을 위한 브랜드’라는 선입견이 깨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박 부회장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기 위해선 내부 전열을 이제라도 다듬어야 한다”고 말했다. 연구개발비를 늘려 글로벌 기업을 능가하는 기술력을 갖추자는 취지다. 최근 한지붕 두가족 팬택과 팬택앤큐리텔의 합병을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계 시장에서 더 큰 성과를 내기 위해선 강력한 시너지가 필요하다는 계산이다. 박 부회장은 “이런 계획이 차질 없이 추진되면 2013년 휴대전화 판매 2500만대, 매출 5조원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며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치열한 경쟁은 이제부터”라고 말했다.

글 이윤찬 기자
사진 이찬원 기자

* 상세한 내용은 19일 발매되는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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