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조태일 '소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산들과 잠시나마

고요히 지내려고

산에 오르면

산들은 저희들끼리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

한점 티끌도 안 보이게

나를 지운다

- 조태일(1941~1999) '소멸'

떠나다니, 떠나다니. 시인은 세상을 두고 떠났다. 뒤늦게야 멍해지는 그 소식 듣고 그의 7행의 게송을 읽어본다.

재깔대는 사람들 속에 무덤덤히 하루 두어마디로 사는 사람 하나가 그 광개토왕비 같은 몸집으로 넘어져 있었다.

어느 때는 하루 넘게 마시는 그런 술이었으니 그 술 깨어나서야 부스스 일어나 세상의 동서남북을 한번 돌아다 보았던 것이다.

사내다웠다. 그 사내다움 속에 고운 여심도 숨어있었다. 어찌 지난번 시집에 그다지도 좋더니 떠나려고 그랬던가.

무릇 시의 진실에는 꼭 참(참)이 들어있노니. 여기 산그늘 속 없어진 '나' 좀 봐!

고은 <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