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메이커의 편지] 원고지 1,000매를 채워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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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본다.

정치인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게 한다.

"21세기의 정치와 정치인의 자질에 대해서 2백자 원고지 1천매로 정리해보라. 물론 다른 이의 책을 참고해도 좋고 남의 글을 컨닝해도 좋다. 저술은 오픈 테스트이니까. 단, 대필만은 금한다. "

주제야 어떻든 1천매의 주문이 몰고올 파장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단행본 편집자는 원고지 1천매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예비 필자를 만나면 이 사람이 과연 1천매에 어떤 가치를 창조할 수 있을까를 탐색하고 때론 10매, 1백매의 글에서 1천매의 가치를 써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기도 한다.

1천매를 채웠다고 해서 책으로 출간되는 것은 아니다.

책으로 펴낼 가치가 1천매에 담겨 있는지 저자와 편집자 사이에 공감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어떤 분야나 주제에 대해서 자기의 생각을 1천매의 글로 담아낸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글쓰는 능력을 제쳐두고라도 20만 자의 여백을 채울 수 있는 내용이 없다면 50매, 1백매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간 펴낸 2백여 종의 책 중에서 가장 긴 글이었던 '히틀러 평전' 은 7천매에 달하는 분량이다.

1백40만 자에 달하는 원고지 여백을 채우고 다시 한글로 옮겨져 독자들에게 책으로 선보이는 데는 10년간의 저술, 1년간의 번역, 3개월간의 편집 등 4천일이 넘게 걸린 셈이다.

소설가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 는 6백매였다.

그러나, 이 소설이 한 권의 책이 되어 독자의 손에까지 닿는 데는 1년간의 창작, 두 달간의 편집이 걸렸다.

만일 작가에게 이 작품의 완성 기간을 묻는다면 10년, 20년이라 답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책은 저자와 편집자, 독자 모두에게 긴 시간의 사색과 고민을 요구한다.

쉽게 생각하면 발빠른 정보의 시대에 1천매의 눈과 삶이 뒤처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앞선다.

그러나, 어떤 분야이든 1천매의 호흡으로 자신의 생각을 쓰는 사람들, 1천매의 가치를 해독하고 소화할수 있는 사람들이 세상의 중심에서 자기 몫을 다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국회의원이든 학자든, 그 어떤 분야의 전문가든 삶의 중심에 서고자 한다면 원고지 1천매의 읽기와 쓰기에 도전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A4용지로 1백40여 쪽, 책으로 2백80쪽 정도의 분량인 원고지 1천매에 삶의 깊이와 넘나듦이라는 경이로운 세계가 있다.

김학원 <푸른숲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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