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건국 50주년] 1. 中 현대사와 함께한 毛초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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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중국은 10월 1일로 건국 50주년을 맞는다.

'아시아의 병자 (病者)' 에서 '세계의 강자' 로 거듭난 중국. 요즘 중국의 TV에선 마오쩌둥 (毛澤東) 의 일대기를 그린 각종 드라마가 봇물을 이룬다.

중국 건국 50년의 출발점이 바로 마오쩌둥이기 때문이다.

격변의 반세기를 달려온 중국의 어제와 오늘을 달라진 사회상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올해 80세의 화가 저우링자오 (周令) .천안문 (天安門) 광장을 거닐 때마다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는다.

보통사람들에겐 똑같은 모습일지 모르지만 그에겐 각별한 의미가 있다.

周는 49년 10월 1일 중국 건국에 맞춰 처음으로 천안문 성루에 걸린 毛의 초상화를 그렸다.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지금의 아내 (당시 제자) 와 함께 2주 가까이 그렸지요. 중앙미술학원 실용미술과에서 가르치며 여러 그림을 그렸지만 30㎡의 대형 초상화는 난생 처음이었어요. "

10월 1일 전야엔 초상화 위에 쓰인 '인민을 위해 일한다 (爲人民服務)' 를 삭제하라는 명령을 받고 다음날 동이 틀 무렵에야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毛주석이 내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 앞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이 자리에서 성립됐다' 고 외치던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어요. " 그러나 당시와 지금의 초상화는 여러 면에서 달라졌다.

"내가 그린 초상화의 毛주석은 8각모를 쓰고 미소를 지었지요. 내게 毛주석은 정치가라기보다는 호쾌하고 풍류를 아는 문인의 이미지가 컸어요. 그래서 옷깃도 풀어 헤친 것으로 그렸는데 점잖치 못하다고 해 고쳤죠. " 건국 초기엔 毛의 초상화에도 혁명의 낭만이 넘쳐흘렀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毛의 초상화가 바뀌었다.

이른바 표준상 (標準像) 개념이 도입되고 정부 소속인 베이징 (北京) 시 미술공사가 담당하기 시작, 63년까진 장전스 (張振士) 화백 (50~63년) 이 맡았다.

張화백이 그린 毛의 초상화는 단정하며 위엄이 있었다.

잇따른 경제정책의 실패 뒤에 이어진 문화혁명의 광기는 毛의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들까지 핍박했다.

49년 이래 毛의 초상화는 측면상이었다.

자연히 한쪽 귀만 그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게 트집이 잡혔다.

"한쪽만 그리니 毛주석이 한쪽 말만 듣고 한쪽 편만 들게 한다. 화가에 문제가 있다는 게 홍위병 (紅衛兵) 들의 주장이었어요. " 64년부터 76년까지 毛의 초상화를 그렸던 왕궈둥 (王國棟.68) 화백은 지금도 어이없어 했다.

"당국에 표준상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세요. 대답은 언제나 측면상입니다. " 그는 영문도 모른 채 2년 동안 문혁의 박해를 받았다. 그런 이유로 문혁 때부터는 毛 초상화에 그의 두 귀가 모두 그려져 왔다.

4인방이 숙청되고 문혁의 잘못이 낱낱이 성토되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지도자가 바뀌면 관청에 걸린 그의 사진도 떼어내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毛의 초상화는 과연 언제까지 계속 내걸릴까. 89년 천안문사태 당시 시위대가 달걀을 집어던지기도 했지만 적어도 한동안은 계속해 천안문에 내걸릴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아직은 중국 정부와 국민들 모두 毛의 유산을 절실히 필요로 하기 때문이란 해석들이다.

그러나 그가 역설한 노선이나 방침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는 천안문 성루에 걸린 초상화처럼 '이미지' 만 남겼다.

그마저 일반국민들에겐 그저 돈벌이의 소재로 쓰일 뿐이다.

중국에선 무언가 돈벌이가 되는 일을 '돈버는 나무 (搖錢樹)' 로 부른다.

요즘엔 毛의 캐릭터가 돈버는 나무다.

毛의 캐릭터가 파고들지 않은 상품이 없을 정도다.

각종 현란한 배지에 그의 얼굴이 자리잡은 것은 그나마 점잖다.

여성들의 T셔츠 가슴 한복판은 물론 아슬아슬한 수영복에도 코믹하게 처리된 毛의 얼굴이 등장한다.

그의 얼굴이 담긴 기념물.장신구의 시장 규모는 이미 1억달러 이상을 넘어섰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세워진 중국 건국 50년. 건국의 아버지 毛는 어느덧 상품화의 대상이 됐다.

중국 정부는 毛가 역설했던 계급투쟁을 사실상 내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모든 활동에서 언제나 毛를 앞세운다.

안정이 필요한 시기일수록 毛의 카리스마적 이미지는 더욱 더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毛가 주장한 내용이 아니라 '毛의 형상' 만을 높이 들고 있다.

중국 건국의 주역인 중국 공산당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자는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도 毛는 깃발로만 남아 있다.

중국 건국 50년, 毛가 남긴 유산은 아직도 13억 중국인과 중국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유산은 실체가 아닌 이미지일 뿐이다.

베이징 = 유상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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