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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2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24) 신문로 테러사건

갑자기 정적을 깬 총성은 우리 대열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정동교회 집회가 다소 과열돼 인민보사를 공격하긴 했지만 우리에겐 각자 손에 들고 있는 태극기만이 유일한 '무기' 였다.

그런데 신문로에 들어서자 마자 30여명의 괴한들이 갑자기 우리에게 총을 난사하며 달려 들었던 것이다.

내 옆쪽에 서있던 세브란스의전 (현 연세대의대) 의 함영훈 (咸永焄.전 캐나다대사) 이 총을 맞아 선혈이 낭자한 채 쓰러지는 게 보였다.

이화여전 황근옥 (黃根玉) 등 몇명도 이미 피투성이가 돼 있었다.

동료들의 피를 보게 되자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모두들 죽겠다는 각오로 앞으로 튀어나갔고 그들은 비열한 여우처럼 꼬리를 내리며 도망치고 말았다.

부상자는 얼핏 봐도 20명을 넘었다.

동료들을 먼저 살려야 했다.

부상자들을 업고 서대문 적십자병원으로 뛰었다.

부상자들을 가까스로 병원에 내려놓고 나자 허탈감과 함께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몰려왔다.

그때 누군가가 김구 (金九) 선생을 만나러 경교장 (京橋莊.현 강북삼성병원) 으로 가자고 했다.

김구선생은 일변 우리를 격려하면서도 방금 전에 있었던 좌익과의 충돌을 염두에 둔 듯 '모든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하라' 고 촉구했다.

우리 민족끼리 싸우기만 한다면 열강들은 오히려 신탁통치 결정이 잘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김구선생 말씀은 구구절절이 옳았지만 절박한 순간을 겪었던 우리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내심 야속한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 저희들만 나무라시지 마십시오. 지도자들이 잘 했으면 저희가 왜 거리로 뛰쳐 나오겠습니까. 지도자들이 잘 못하니 군정도 생기고 신탁통치도 받으라고 저들이 그런 것 아닙니까?" 하고 나서고 말았다.

민족혼의 상징이었던 그분에게 애송이 하나가 덤빈 꼴이 됐으니 임정 측근들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그때 동료들도 나서서 '애국학도들이 반탁운동을 하다 죽으면 세계 언론이 보도할 것이고 우리 민족의 반탁여론도 그들에게 전달이 될 것 '이라고 가세했다.

김구선생은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네들을 보니 내 젊은 시절 생각이 나네"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자네들 하는 일을 나무라는 건 아닐세. 다만 애국운동은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말한 것 뿐이야" 하고 말했다.

경찰조사결과 테러공격의 주역은 좌익의 사설 군사단체인 '국군 준비대' 와 '학병동맹' 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경찰은 학병동맹 세력 뿐만 아니라 우리측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도 연희대 앞을 지나가다 경찰에 붙들렸다.

나는 그들에게 "내 발로 걸어갈 테니 잡지 마라" 고 호통을 친 뒤 앞장서 경찰서로 갔다.

이때 체포된 반탁학련 간부는 모두 49명, 1차로 36명이 석방됐지만 나는 풀려나지 못한 채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2월 19일 갑자기 장택상 (張澤相) 수도경찰청장이 서대문경찰서를 찾아와 나를 호출했다.

나는 張청장을 보자마자 '빨갱이 뿐만 아니라 애국학도도 잡아넣는 당신은 도대체 애국자요, 아니면 적이오? '하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張총장은 '군정하에서도 법질서는 지켜야 한다' 며 화제를 학교문제로 옮겼지만 워낙 내가 거세게 항의하자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불렀다.

백낙준 (白樂濬) 교장이 거기 와 있었다.

白교장은 내게 '연대에 좌익학생들이 준동해 그대로 두면 큰일 날 것 같다' 며 나를 석방시켜 줄 것을 張청장에게 부탁해 놓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다른 학생들을 석방시키지 않으면 나가지 않겠다' 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張총장에게서 며칠 안에 학생들을 모두 석방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다음에야 나는 경찰서 유치장을 걸어 나왔다.

이날이 2월 20일이었다.

글= 임동원 전 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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