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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정부, 외화 차입 제한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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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원화 가치가 8일 1년여 만에 최고치인 달러당 1167원으로 치솟았다. 서울 을지로2가 외환은행 본점의 환율·주가 전광판 앞에 딜러들이 서 있다. [연합뉴스]

외환당국이 은행과 공기업의 해외 외화 차입을 제한하고 나선 것은 금융위기 이후 ‘달러 차입’을 최우선 했던 정책 기조를 ‘달러 차단’ 쪽으로 급선회하고 있다는 신호탄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가파른 원화 가치 상승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서다. 정부는 내심 경기 회복과 수출 기업 질주의 원동력이 됐던 환율 효과를 좀 더 누리고 싶다는 욕구를 갖고 있다.

원화 가치는 8일 달러당 1167원에 마감, 3월 2일 연중 저점(1570.3원) 대비 25.7% 상승했고 9월 이후 한 달 새 5.9% 올랐다.

정부는 그동안 시장에 대한 완력 행사는 가급적 자제해 왔다. 무리한 시장 개입을 내키지 않아 하는 윤증현 경제팀의 스타일도 한몫 했지만, 원화 가치가 어느 정도 상승해도 수출 기업들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속도’가 문제였다. 원화 가치가 연일 가파르게 상승하자 당국도 이런 인식을 마냥 고수할 수만은 없게 됐다. 최근엔 원화 가치 상승을 예견한 투기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다. 외국인들이 국내 주식을 내다팔면 통상 외환시장에선 ‘달러 매수, 원화 매도’가 일어나야 하는데 최근엔 외국인 주식 매도와 관계없이 원화 가치가 계속 오르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급기야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 참석차 터키 이스탄불을 방문 중이던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3일(현지시간)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환율에 대한 시장의 평가를 존중하지만 투기적 거래의 신호가 포착되면 변동성을 줄이기 위한 시장 조정책(market operations)을 사용할 것”이라고 강력한 경고까지 했지만 원화 강세의 흐름을 막지 못했다.

사실 은행과 공기업의 외화 차입 제한은 외환당국이 원화가 강세일 때마다 사용해 온 단골 메뉴다. 시장에 큰 무리를 가하지 않으면서도 시중 달러 공급을 줄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올해만 해도 9월까지 은행과 공기업의 공모 방식 달러 조달 규모가 은행 108억 달러, 공기업 30억 달러 등 140억 달러에 이른다.

당국은 이번 기회에 시장에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겠다는 생각이다. 더 이상 달러 유입에 목을 매고 있지 않다는 신호를 분명히 함으로써 시장 참여자들이 원화 가치 상승 쪽으로 무리하게 베팅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이미 시중에 달러가 넘치고 있는데다 외환보유액이 사상 최대 규모에 근접해가고 있는 것도 이런 판단의 배경이 되고 있다(9월 외환보유액 2542억 달러).

전문가들은 일단 당국의 의지가 먹혀들 것으로 본다. 우리선물 변지영 연구원은 “9월 말 이후 구두 개입은 물론이고 실제 물량개입 강도도 세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1100원대 중반을 지키려는 당국의 의지가 강한데다 글로벌 달러 약세도 다소 둔화되는 양상이어서 연말까지 달러당 1150원대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관건은 글로벌 달러 약세가 어디까지, 어떤 양상으로 진행될 것인가다.

한국경제연구원 허찬국 거시경제연구실장은 “한국 경제의 회복 속도가 미국이나 유럽보다 빠른 데다 달러 약세가 이어지고 있어 외국인 투자자금이 내년까지 계속 유입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정부가 개입하면 원화의 절상 속도를 다소 늦출 수 있지만 달러 공급이 넘치기 때문에 큰 방향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상렬·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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