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감상노트-음악] 서울국제음악제등 선율의 향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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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창가를 두드리고 지나간다. 이제 한여름의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엇인가를 가슴 속에 묻어 두어야 할 때가 다가온다. 전람회장을 돌아보며 혹은 공연장의 객석에 앉아 문화의 향기에 젖어들어 보자. 전문가들의 이 계절 문화감상법을 소개한다.

두서없이 흐트러지고 헝클어진 지난 시절 추억의 단편들을 제대로 추스리고 안으로 삼키려면 음악만한 동반자도 없다. 혼자라도 좋다. 귓속을 맴도는 선율과 함께 연주회장을 나서보라.

9일부터 14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99서울국제음악제' 는 이같은 사색과 흥취를 위한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음악회다. 조금만 일찍 서두른다면 귀뚜라미 소리 들으며 우면산 자락을 산책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매일 하루같이 찾는다 해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다채롭게 꾸며진 프로그램이 시선을 끈다.

지난해 던지고 간 감동의 여운이 채 가실 틈도 없이 다시 피아니스트 백건우 (白建宇)가 찾아 온다. 늘 새로운 모습으로 고국을 찾는 그가 이번에는 서울시향과 함께 강석희 (姜碩熙) 의 '피아노 협주곡' 을 국내 초연한다.

아닌게 아니라 이번 음악제는 국내 작곡가들에게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다. 코리안심포니는 임지선의 '개벽' 을 들려줄 예정이며 서울바로크합주단은 아예 윤이상의 작품만으로 무대를 마련하고 있다.

KBS교향악단이 장식할 피날레 공연에도 우종갑의 축전서곡 '하나의 세계' 가 포함돼 있다.

새로운 천년을 코앞에 둔 시점이기에 이런 시도가 더욱 돋보인다. 게다가 '99교향악축제' 에 이어 계속되는 한국 창작음악에 대한 관심이기에 한번 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을 거점으로 한 정상급 오케스트라가 총망라된 자리에 NHK체임버 오케스트라를 부른 것도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비록 실내악 규모이지만 한국과 일본의 오케스트라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한국 작곡가 김용진 (金容振) 의 '해금과 현악합주를 위한 소협주곡' 을 어떻게 들려줄 지 자못 궁금해진다.

가을의 정취라면 볼쇼이 합창단이 들려주는 러시아 음악이 제격이다. 김혜정과 함께 하는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피아노 선율 역시 이 계절에 더욱 가슴을 파고드는 음악이 아닌가 싶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누군가를 불러 함께 해도 좋을 자리다. 보고 싶어도 부르지 못할 누군가가 있다면 음악과 함께 꼭꼭 추억으로 묻어두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홍승찬 <음악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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