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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병욱칼럼] 과거 들쑤시기 이젠 그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김영삼 (金泳三)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賢哲) 씨에 대한 잔형 (殘刑) 면제 사면조치를 놓고 비판여론이 거세다.

아버지의 위세를 업고 권세를 휘두르며 축재를 했으니 그의 행태는 갈 데 없는 권력형 부패다.

오죽하면 아버지가 대통령이었을 때도 구속기소를 피할 수 없었겠는가.

그의 사면에 반대하는 민심의 흐름은 당연하다.

사면.은사 (恩赦) 권은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법부의 결정을 뒤엎는 조치여서 법치 (法治) 를 훼손한다.

때문에 대통령의 사면권은 원칙을 세워 형평에 맞게 신중히 행사돼야 하는 내재적 한계를 지닌 제도다.

현철씨의 경우는 정치인도 아니기 때문에 그의 범법은 정치적 성격보다는 파렴치성이 강하다.

그가 전직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이유 외에는 판결이 막 확정된 이 시점에서 그가 사면 대상이 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면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사면대상으로 고려될 만한 것인가.

1974년 닉슨 미국대통령이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사임한 뒤 그 자리를 승계한 포드 대통령은 그가 스스로 인책 사임한 것을 감안해 닉슨의 범법행위에 대해 사면조치를 취했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아니라 인책 사임한 전직 대통령을 사면했는데도 미국민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음 선거에서 포드에게 패배를 안겼다.

물론 한국은 미국이 아니다.

민주.법치주의 정착도도 다르고 국민의 정서나 법감정도 같지 않다.

오랜 정치보복의 역사를 지내 온 우리로서는 당분간 칼 같은 법집행보다는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끊으려는 집권자의 유화조치가 더 바람직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전직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과 국민여론 사이에서 '부분사면' 을 궁리해 낸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인간적 고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돌출적이냐, 정치보복 단절 및 과거에 대한 용서와 화해란 기본 흐름에 기인한 것이냐다.

현철씨 사면에 대해 지금 비판이 거센 것은 많은 사람이 그 조치를 돌출적으로 본다는 증거다.

용서와 화해가 현 정부의 국정운영 기조라고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원칙도 없고, 형평에도 맞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오래전 야당시절부터 정치보복 단절을 내세워 온 현 집권세력은 집권 초에 과거와 선을 긋는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지금까지와 같이 선거.정치비용이 많이 드는 상황에서 지역구를 관리하고 선거를 치르는 정치인은 거의 모두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범법자가 될 수밖에 없다.

천문학적 규모의 비용이 드는 대통령선거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때문에 정치인이 돈 받은 일로 문제가 되면 "재수 없어 걸렸다" 는 것이 세평이고, 본인 스스로도 반성하기보다는 억울함을 호소한다.

박정희 (朴正熙)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선제를 폐지하면서 그 이유의 하나로 국가경제가 흔들릴 정도로 돈이 많이 든다는 점을 내세운 적이 있다.

87년, 92년 선거의 경우에도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이 동원됐다.

여야간에 동그라미 하나 (one digit) 정도의 격차가 있긴 했지만 야당도 적지 않은 돈을 썼다.

현정부하에서 실시된 지방선거와 몇차례 국회의원 및 지방자치단체장 보궐선거에도 엄청난 자금이 동원됐다.

이런 엄청난 자금의 상당 부분이 합법적으로 모금된 자금이 아닐 것은 뻔하다.

오히려 합법보다는 불법 부분이 훨씬 더 클 것이다.

이런 보편적 불법상황에서 몇몇 정치인의 불법 정치자금을 가려내 처벌한다는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고 정치자금법 위반을 모두 불문에 부칠 수도 없고, 특정인만 처벌하자니 설득력이 없어 당국으로서도 딜레마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선돼야 할 일은 돈 안드는 선거와 정당구조, 정치자금 조달 및 사용의 투명성 강화와 여야간 균형 배분등을 위한 정치제도개혁이다.

金대통령도 광복절경축사를 통해 이런 내용이 포함된 정치개혁을 다짐했다.

정치권은 무엇보다 현실적이고 투명한 정치자금법에 시급히 합의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과거의 정치자금법 위반에 대해선 가급적 불문에 부치는 대신 새로운 법은 철저히 지키고 위반행위에 대해 여야를 막론하고 철저히 적발.엄벌하는 미래를 향한 대국민 다짐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과거에 발목이 잡혀 정치가 한발짝도 못나가고 각박해지기만 하는 지금의 상황은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

그러자면 과거와 선을 긋고 용서와 화해, 그리고 미래로 나가는 어떤 전기 (轉機)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정치제도 개혁은 그 좋은 기점이 될 수 있다.

성병욱 본사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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