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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5) 박대통령의 고민

62년 가을 어느날 퇴근 무렵.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이 '술이나 한잔 하자' 며 내게 전화를 해왔다.

몇분 후 수행원도 없이 청와대에 온 그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내뱉는 것이었다.

"이거 쿠데타 잘못한 거 아이가. 이건 숫제 빈 집이야. 털려도 몇번은 털린 거야…" 내가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고 묻자 "국고 (國庫)에 돈 한푼 남아 있지 않소. 이렇게 가다가는 제대로 일도 못해 보는 것 아니오? 나는 순전히 감투 하나 쓰고 싶어 쿠데타 한 꼴이 되고 말이야…" 하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평소 정이 많고 사심 (私心) 이 없는 朴대통령은 나에게만은 무슨 얘기든 흉금을 다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내가 적당히 비위나 맞춰 주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점을 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그날따라 무척 힘이 없어 보였다.

직감적으로 뭔가 위안의 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36년간 일본한테 수탈당한 것도 모자라 전쟁까지 치렀는데 언제 국부 (國富) 를 축적할 여유가 있었으며 뭐가 온전히 남아 있겠습니까.오히려 남아 있는 게 이상하지요" 하며 위안을 했다.

내 말에 다소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밑천 갖고 장사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빌려오면 된다' 고 하자 대통령은 의아해하면서 "어디서 빌려오느냐" 고 물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돈을 빌려 올 곳은 현재 일본밖에 없다.

지금 일본은 미국의 영향권에 들어 있고 과거 제국주의 시대와는 다르다.

일본한테 배우고 도움을 받는 것이 조금도 부끄러운 게 아니다.

지금은 서로 돕고 배우는 것이 국제 선린사회의 보편적인 현상' 이라며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설득했다.

朴대통령도 일찍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5.16 석달만인 61년 8월 이미 한.일 예비회담이 열렸고 10월 24일에는 김종필 (金鍾泌) 중앙정보부장이 일본을 방문, 이케다 하야토 (池田勇人) 총리와 막후교섭을 벌인 것도 이를 잘 입증해 주는 대목이다.

그러다 62년 들어서는 일본측이 강경으로 돌아섰고 국내에서도 반론이 거세게 일면서 朴대통령 역시 쉽게 결심을 못하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 듣고만 있던 대통령은 몇 차례나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국에 대한 언급도 놓치지 않았다.

"한국이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고 있는 것도 알고 보면 미국이 할 일을 대행하고 있는 것 아니냐. 우선 미국 돈으로 사업을 벌여 부자가 된 뒤 갚아주면 될 것 아니냐" 고 했다.

요컨대 한.미관계를 안보차원에서만 보지 말고 경제적인 차원으로 시각을 바꿔야 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월남전에 대해서도 나는 '단순히 전쟁으로만 볼 게 아니라 시장성 측면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 는 논리를 전개했다.

나는 내친 김에 '비록 국고는 바닥났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며 한 가지 고무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대통령이 귀를 쫑긋하면서 "그게 뭐냐" 고 묻길래 '바로 우리 국민을 수출하는 것' 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더욱 황당하다는 듯 "사람을 수출하다니…" 하며 내 다음 말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우리가 수출할 대상은 바로 숙련된 근로자와 간호사들' 이라고 말하고 '현재 유럽은 물론 기름으로 벼락부자가 된 중동 지역에서는 그런 숙련된 인력을 구하느라 야단들' 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내 말이 끝나자 그는 수첩을 꺼내더니 깨알 같은 글씨로 메모했다.

뭐든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메모하는 습관이 몸에 밴 탓이었다.

그 메모는 1년 후인 63년 ▶미국국제개발처 (AID) 차관도입 (12월 7일) ▶광원들의 독일 파견 (12월 27일) 등으로 현실화됐다.

63년 2월초. 朴대통령은 갑자기 나를 자신의 집무실 (세종로 주한미대사관 옆 문화관광부 자리) 로 불렀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글= 이동원 전 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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