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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하기 좋은나라 멀었다] 3. 어설픈 규제개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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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홍익회.페리칸 벤딩 등 자동판매기 운영업체 관계자들은 요즘 "어설픈 규제개혁 때문에 기업이 멍든다" 고 하소연한다.

기계 한대로 장사하는 개인이나 수백대를 운영하는 대형업체나 영업신고 체계가 비슷해 불편한 점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같은 건물에서 여러개의 자판기를 설치하는 경우 자판기 한대당 별도로 영업신고를 해야 한다는 식이다.

최근 업계에서 여러차례 시정건의를 한 후에야 보건복지부가 영업신고 한번으로 끝날 수 있게끔 관련 법을 개정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자판기가 있는 지방자치단체별로 영업신고를 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

서울 강남구와 중구에 각각 1백50여개 자판기를 별도로 설치, 운영하고 있는 업체라면 예외없이 영업신고를 위해 강남구청과 중구청에 1백50여번씩 들락거려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자동판매기공업협회 관계자는 "일부 지자체에서는 대표자 및 영업장 사진.영업장 상세위치도까지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고 말했다.

졸속 규제개혁에 기업이 멍든다.

앞 뒤 가리지 않고 일단 풀어놓고 보자는 건수 위주의 규제개혁, 변죽 울리기 규제철폐 등이 기업활동을 되레 옥죄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섣부른 규제개혁이 일부 그릇된 공무원들의 호주머니를 채우는 호재로 이용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못쓰게 된 타이어나 가전제품 등을 내다 버리는 데 드는 비용을 미리 내게 하는 '폐기물 부담금 제도' .우리나라처럼 생산업체들이 일률적으로 부담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어 업계의 원성이 높았다.

이에 따라 지난해 12월 정부는 규제개혁 차원에서 현행 폐기물 예치금 제도를 대폭 개선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시큰둥한 반응이다.

정작 가장 중요한 내용은 쏙 빠졌기 때문이다.

가전제품이나 폐타이어가 폐기되는 시점은 만들어진 이후 최소 3~5년이 지나야 하므로 출고할 때 예치금을 부담하더라도 그 기간 만큼 법정 이자율 기준으로 할인해 주기로 한 당초 방침이 반영되지 않은 것.

되레 정부는 현행 폐기물 ㎏당 38원씩 내야 하는 기준 요율을 대폭 올릴 계획이어서 업계의 부담만 더 늘어나게 됐다는 푸념이다.

건설업계에선 '민자유치 규제법' 이라 불릴 정도로 문제가 많았던 민자유치법. 최근 바뀐 '민간투자법 및 시행령' 은 조기 시공 인센티브제도 등 과거에 비해 개선된 내용을 많이 담았다.

그러나 기업 입장에선 달라진 게 별로 없다.

무엇보다 바뀐 법을 뒷받침할 금융.세제 지원이 예전과 거의 같기 때문이다.

민자사업은 업체들이 컨소시엄을 형성, 추진하다 30% 이상 지분을 가지면 공정거래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하나의 사업에 최소 4개 이상의 기업체가 모여야 한다.

따라서 1백% 자기자금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싶어도 하기 힘든 구조다.

통상 소요 자금의 4분의3 정도는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조달하게 되는데 이 역시 여의치 않다.

대출에 따른 위험가중치가 1백%로 정해져 있어 부실을 우려한 은행 등이 좀처럼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기 때문. 식품분야도 사정은 마찬가지.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최근 규제완화 차원에서 냉면과 메밀국수의 '성분 배합 기준' 을 없앤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식품의 성분에서부터 제조.위생기준까지 식품에 대한 모든 내용이 담겨 있는 '식품공전 (食品工典)' 의 개정작업에 착수했다.

'냉면이라는 명칭을 쓰려면 메밀가루가 5% 이상 돼야 한다' '메밀국수는 메밀가루가 30%를 넘어야 쓸 수 있다' 는 등의 시시콜콜한 규정을 없애겠다는 것. 그러나 A업체 관계자들은 식의약청의 이런 발표에 코웃음친다.

어차피 식품위생법에 따른 표시기준에 이같은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에 냉면.메밀국수라는 명칭을 별 생각 없이 썼다간 불이익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핵심을 비켜가는 규제개혁의 실상들이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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