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초당적 대통령' 대망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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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수마 (水魔) 와 태풍이 전국을 할퀴는 사이에도 국회의사당의 주된 관심사는 내각제 파동의 후유증이었다.

"내각제 유보는 희대의 사기극" "대통령의 통치권은 이미 실질적 효력을 상실했다" "YS정권과 현정권의 차이가 무엇이냐" …. 공동정권에 소속된 한 의원의 본회의 발언이다.

내각제 개헌을 위해 돌진해온 자민련 의원의 분풀이성 독설 (毒舌) 이라고 대범하게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의 정서를 대변하는 듯한 한 신문의 4단 만화 내용은 예사롭지가 않다.

"작은 도둑은 감방에서 썩고" (탈주범 신창원이 감방에서 좌정한 채 내뱉는 말) /큰 도둑은 해외나들이/ "작은 거짓말 하면 벌 받고" (어머니로부터 회초리를 맞는 아이의 말) / "큰 거짓말 하면 총리나 대통령" (매맞은 아이가 울면서 친구들에게 한 볼멘소리) - . 신창원이 붙잡힌 데 이어 내각제 개헌이 무산된 뒤 나온 이 만평의 내용이 꼭 옳다고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태 (世態) 와 국민정서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추궁한 것만은 틀림없다.

문제는 이런 냉소적인 시각과 인식이 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다.

김영삼 (金泳三) 전 대통령의 정치재개는 그 명시적인 영향이라고 하겠다.

YS가 이 사태를 '부활' 의 계기로 재빨리 낚아챘다고 분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처에서 이미 '후3金시대' 의 도래를 개탄하고 있다.

예전의 호남차별론이 DJ의 오늘을 있게 한 주요인이었듯이 이번엔 거꾸로 부산 소외의식이 '국가 경제를 부도 직전까지 몰고갔던 실패한 전직대통령' , 다시 말해 정치적으로 사실상 '죽은' YS를 살리는 쪽으로 움직일 개연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론 동물적 후각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YS가 이 기미를 놓칠 리가 있겠는가.

김종필 (金鍾泌) 총리가 내각제 파동으로 자민련 주류는 물론 충청권 여론이 들끓자 내년 총선에 당으로 복귀하겠다고 한 것도 자기 '영지 (領地)' 를 틀어쥐어 다진 기반을 바탕으로 현재 위상을 유지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집권 핵심세력은 '후3金시대' 를 우려하는 논조에 대해 DJ와 현정권을 곤경에 몰아넣으려는 수구저항세력의 음모로 힐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 사람은 실패로 끝난 과거의 대통령이었는데 현재 국정을 맡고 있는 다른 두 金씨를 성 (姓) 만 같다고 해서 어떻게 동렬 (同列) 로 취급해 도매금으로 비난할 수 있느냐는 항변이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따라서 "글 쓰는 사람들의 의도가 보인다" 고 흥분했다는 말도 들린다.

YS집권 때도 정권의 위기상황이 발생해 비판적 여론이 형성되면 수구저항세력의 준동으로 몰아세웠었다.

독재 타도에 바쳤던 상도동.동교동 세력의 정서적 공감대가 이 한 점에선 일치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 민주화세력의 권위와 도덕성은 바로 이 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것이 양세력의 개혁추진 명분이자 토양이었다.

그들은 비판자들에게 "군사정권 때 너는 뭘 했느냐" 고 추궁하면서 수구파로 단죄해 개혁정책의 타당성 논의를 원천봉쇄했거나 하려 한다.

그러나 지도자와 정권의 도덕성은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YS와 DJ는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으로 민주주의 투쟁에 대한 보상을 받았고,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집권 이후 권위와 도덕성은 치적이 밑거름이 돼야 하는데 집권세력은 이 점을 잊고 있다.

정권에 대한 신뢰가 국민은 물론 공동정권 안에서조차 흔들리고 있는 이런 상황은 현정권이 초래한 것이다.

DJ가 자신은 물론 국민이 가장 바라는 정치개혁을 앞으로 어떻게 추진할 수 있을지가 의문시되는 분위기다.

'후3金시대' 의 우려를 막고 정치개혁이 제대로 추진되기 위해선 DJ가 이제 살신성인할 차례가 됐다고 본다.

그 방법은 金대통령이 일찍이 지난 97년 5월 대통령후보 수락연설에서 제시했다.

"당의 자율성과 국회의 독립성을 높이기 위해 대통령 당선후 총재직을 사퇴할 것" 이라고 말한 선언을 실천하는 일이다.

단임 대통령으로서 정파를 초월한 입장에서 정치와 국정을 운영하는 결연한 자세를 보임으로써 국민의 신뢰도 되찾고 참된 민주정치를 구현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라고 나는 본다.

현임 대통령이 정권 재창출의 미련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21세기를 내다보는 정치개혁을 강력히 밀고 갈 때 국민의 성원이 정치권의 당략 (黨略) 을 압박할 것이다.

새 천년대를 맞는 즈음에 뭔가 새로운 정치구조의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수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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