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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는 80년대의 문제, 中 최대 모순은 도농 격차”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SUNDAY는 건국 60주년(10월 1일)을 맞이한 중국 대륙의 현인(賢人)들을 연쇄 인터뷰했다. 중국의 새로운 꿈과 도약을 짚어 보기 위해서다. 지난주에 104세의 저우유광(周有光) 선생을 소개한 데 이어 두번째로 중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꼽히는 50세의 왕후이(汪暉) 칭화(淸華)대 인문학원 교수를 만난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2년 전 그를 ‘세계 100대 영향력 있는 지성’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왕후이 교수가 13일 인터뷰 도중 활짝 웃고 있다. 그는 한국 사회를 어느 중국인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베이징=이양수 기자

왕후이 교수는 13일 오후 4시10분쯤 약속 장소인 베이징의 차오양(朝陽)구 상하이 음식점 쑤저후이(蘇浙<6ED9>)에 나타났다. 첫 인상은 중국 액션 스타 리롄제(李連杰)를 떠올리게 했다. 노스페이스 브랜드의 파란 재킷과 청바지 차림, 해맑은 얼굴 때문이었다.

그는 자유주의자였다. 민감한 주제인 민주화 문제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민주화는 1980년대에 흘러간 문제”라며 “중국도 정권의 합법성(정당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개혁과 변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의 최대 모순을 도시와 농촌의 격차라고 압축했다. 대화는 막힘이 없었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중국 지식계를 대표하는 ‘독서’ 주편(主編)을 맡은 학자답게 탐구 영역이 넓었다. 그는 중문학으로 시작해 철학·역사·경제학·정치학 등을 공부했다. 인터뷰는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본지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필자)와 본지 기자가 묻는 형식으로 3시간 남짓 진행됐다. 왕 교수가 이따금 한국 관련 질문을 던질 때도 많았다.

‘중국의 향후 최대 고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인구 고령화”라고 답했다. “중국 인구는 많지만 노동력은 부족하다. 중국 남부 지역에 돈 벌러 온 중동계 무슬림 노동자들이 장례 문제를 둘러싸고 충돌을 일으켰다. 중국도 외국 인력이 들어오면서 다원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왕 선생은 중국·인도 같은 아시아 대국들이 서구와 다른 발전의 길을 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길인가.
“모든 나라에는 문화적인 차이가 있다. 중국은 동북아 국가면서 동남아이기도 하다. 중국은 아시아 여러 지역의 연결점이다. 중국은 아태 지역의 여러 문명과 가까이 있고 연결하는 곳이다. 미국이 과도하게 주도하는 세계 질서는 변해야 한다. 국제 질서가 여러 개의 지역 연합을 통해 상대적으로 다원화될 것이다.”

인도, 중국식 모델 따르면 안 돼
-인도는 점진적인 민주화·산업화를 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공산당 주도 아래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두 나라의 발전 모델을 비교해 달라.
“중국 정치구조는 일체화가 잘돼 있다. 서구식 현대화의 잣대로 잰다면 중국은 사회 동원 능력이 인도보다 훨씬 뛰어나다. 혁명 과정에서 기층 농민까지 동원됐었다. 중국은 경제발전에 집착하고 서구화·현대화에 더 가까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인도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고 관찰한 적이 있다. 인도 사회를 보면 카스트(신분) 구조가 너무 복잡하다. 내부 모순은 중국보다 훨씬 더 많다. 또 정치구조상 중앙·지방이 조화되기 어려워 경제발전에 불리할 수 있다. 철도·도로를 건설하는 데도 관계가 복잡하다. 2∼3년 새 인도의 변화가 빨라졌다고 하지만 중국의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다. 반면 인도는 서방 적응성이 강하다. 장기간 영국 식민지를 겪었지만 서방에 대한 저항감이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엘리트 계층 가운데 영어 구사자가 전체 인구의 10%에 이른다. 이들은 영어를 모국어처럼 쓴다.

인문·사회과학 논문을 봐도 영어로 쓰지 않으면 논문 취급을 받지 못한다. 이런 일은 중국에서 발생할 수 없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인도가 갈수록 중국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요즘 인도 신문의 톱기사는 대부분 중국 관련 내용이다. 뉴델리·콜카타(캘커타)와 상하이를 오가는 비행기는 거의 만석이다. 중국인들이 과거 선전특구와 일본·한국에 갔던 것처럼 인도인들이 중국으로 시찰하러 온다. 인도의 사회 모순이 격화된 원인도 중국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경제특구 정책은 완전히 중국을 모방했다. 그러나 인도는 중국과 달리 사회 동원 능력이 약하다. 새로운 조치를 할 때마다 법규를 바꿔야 한다.
몇 년 전 인도는 독립 이후 처음으로 군대를 동원해 농민 시위를 진압해야 했다.”

-개도국에서 1인당 소득(GDP)이 3000달러를 넘으면 사회 갈등이 격화된다. 왕 선생은 복지국가를 주장했는데 복지·발전·민주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나.
“중국이 유럽형 복지국가로 갈 가능성은 아주 낮다. 농촌 인구 비중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 다른 어려움도 많다. 유럽에선 세수와 소득 재분배를 통해 복지정책을 실현하고 있다. 중국도 여러 지역에서 농업세를 없애거나 토지 사용권과 이익 분배 등을 실험하고 있다.”

-왕 선생은 ‘봉건시장자본주의’라는 독특한 단어를 쓴 적이 있다. 그것이 농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하나의 통일적인 모델은 없다. 쓰촨 같은 곳에서는 전통적으로 국영기업 비중이 높다. 이들을 민영화하는 것보다 이익을 어떻게 인민에게 환원하느냐가 중요하다. 일반적인 복지국가는 주로 세금을 통해, 즉 2차 분배를 통해 정책을 실현하나 이는 중국 실정에 잘 안 맞을 수 있다. 중국의 국영기업은 명의상 전민(全民)소유로 돼 있다. 토지 가운데 도시 토지는 국유, 농촌 토지는 집체소유다. 철저한 사유화론과 국유화 유지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하지만 토지가 시장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듯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실직한 농민공들은 돌아갈 고향과 토지가 있기 때문에 그나마 괜찮았다. 중국의 토지제도는 어떤 측면에서 사회보장제도다. 농촌 토지를 사회보장기금 형태로 개발·운영한다면 복지를 실현하는 코스트가 적게 먹히고 생산과정에서 복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2차 분배를 통한 복지가 아니기에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부패 문제가 심화되고 있는 것 같다.
“사회주의 국가들만 비교한다면 러시아의 부패가 가장 심하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관(官)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부패를 극단적으로 증오한다. 러시아에서 정부 관료 출신들이 독점과두기업가로 변신한 것은 공개적이고 합법적이었다. 중국도 이런 경향이 있지만 사회적인 반발 역시 대단히 강력하다. 그래서 기업인들을 상대로 ‘중앙기율위원회 관료인데 조사에 협조해달라’고 말하면 감히 신분증을 보자는 말도 못하고 따라가는 사건이 벌어지곤 한다.”

-최근 한국에서는 중국의 강력한 정치 리더십을 부러워한다. 이것이 경제발전의 추동력 아닌가.
“신장 위구르 문제나 시짱 티베트 소요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나.”

-베이징 거리에서 많은 구호를 보았는데 화해(和諧: 조화)라는 단어가 많았다.
“위기가 도처에 있다(危機四伏). 지금처럼 사회 모순이 많을 때가 없었다. 문화혁명 시대는 특수했지만 지금의 사회 모순은 폭력화 경향이 심한 편이다. 이런 현상은 과거에 없었다.”

중국의 지식인은 압력·특권 함께 받아
-중국 정치는 과거에 비해 안정돼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충돌이 있었지만 합법성(정당성) 이 강했다. 지금의 문제는 합법성 문제다. 여러 나라들을 비교해보면 중국 정부는 아주 능력 있는 정부다. 이번 금융위기의 정책 대응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럼에도 중국 정부는 이따금 합법성 위기에 직면한다. 이런 점은 다른 나라에 없는 현상이다. 예를 들면 올여름 영국에 갔는데 내가 보기에도 영국 정부는 별로 일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정권의 합법성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더 한심했다. 중국 정부가 요즘 조화를 얘기하는데 일정한 수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합법성 위기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기본적인 정치제도와 가치관에 존재하는 문제들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위기를 겪지만 기본 정치제도에는 영향이 없다. 그러나 중국은 작은 위기에도 기본 제도의 위기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꼭 민주화의 문제가 아니다. 아다시피 민주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 않은가. 지난 30년간 합법성 문제에 대해 많은 논쟁을 해왔는데 이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안정을 이루는 핵심이다. 정부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 것보다 기본 제도의 합법화가 더 중요하다. 객관적으로 말해 우리 정부는 아주 능력이 있다. 최근 신장 위구르 문제가 있었지만 미국은 LA 흑인 폭동 사태, 프랑스는 이민자 폭동 문제 등을 겪었다. 그러나 미국·프랑스가 기본 정치제도에까지 충격을 받은 건 아니다.

그런데 중국은 자칫하면 기본 정치제도에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앞으로 10년 안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문제는 누구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른다. 민주화 문제는 80년대의 쟁점이었다. 민주화 물결은 이미 지나갔다. 객관적으로 민주화 과정을 거친 러시아·우크라이나와 동유럽 국가들과 비교할 때 그들이 중국보다 더 나은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치개혁과 변혁은 필요하다. 합법성의 재건이 필요하다. 지난해 삼련(三聯)출판사에서 내가 쓴 『비(非)정치화의 정치』라는 책을 출판했다. 나는 ‘정치가 없는 정치’를 지적하고 싶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권력구조에 의존하는 모델에는 확실히 여러 가지 위기가 잠복해 있다.”

-최근 중앙SUNDAY가 세계적인 석학 폴 케네디를 인터뷰했는데 그는 강국의 조건으로 민주화보다 정치 안정을 더 중요시했다.
“어떻게 정치 안정을 실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지금 서양 사람들은 민주 아니면 독재 혹은 비(非)민주 두 가지로만 이야기한다. 이러한 이분법은 아주 간단하다. 민주화와 경제발전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걸 많은 사람이 인정한다. 한국 사례를 들면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비민주하에서 경제발전을 이루어왔다. 그러나 문제는 비민주하에서 어떻게 합법적인 통치를 실현하느냐다. 우리가 마오쩌둥 시대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겠지만 그 시대의 기본 정치제도는 아주 합법적이었다.”

-한·일은 서구화됐고 중국은 서구화의 초기 단계여서 그런 것 아닌가.
“중국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서구화 수준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러나 사회체제의 서구화는 아주 약하다. 한·일은 서방체제 안에 편입돼 왔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다. 생활 면에서 중국과 미국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지만 양측의 사회체제는 많이 다르다. 중국은 정치체제 면에서 단기간에 큰 변화가 있을 수 없다. 혹시 변화가 있더라도 서방 국가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도 변했지만 서방체제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것은 냉전과 관련이 있다. 중국 대중의 세계 질서에 대한 내재적인 의식은 많이 다르다.”

-한국의 민주화 단계에서 지식인이나 학생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중국 지식인들은 사회 문제를 떠안을 자세가 돼 있는지.
“중국에서도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지식인이 일부 있다. 예컨대 향촌운동이 있고 NGO도 좀 있다. 하지만 한국의 80년대와는 많이 다른 상황이다. 80년대 이후 국가는 지식인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특권을 주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이미 직업적인 학자로 변화했다. 나머지 태반의 사람들은 기술관료나 전문가로 변신했다.”

베이징= 이양수 기자 yas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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