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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 철학·역사로, 경계없는 학구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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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호 06면

왕후이 교수의 『현대중국사상의 흥기』(총 4권· 2004년 첫 출간)는 지난해 재출간됐다.

왕후이는 신(新)중국의 대표적인 국내파 사상가다. 전공도 중문학이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도 루쉰(魯迅:문인·사상가)이다. 루쉰중학, 양저우사범대학(중문과)을 졸업한 뒤 난징대학(석사), 사회과학원(박사)에서 공부했다. 박사학위 논문은 ‘반항·절망:루쉰과 그 문학세계’였다. 그에게 학위는 운전면허증 같은 것이었다. 전공 분야와 관계없이 관심 분야가 철학·역사·정치학·경제학 등으로 뻗어나갔기 때문이다. 왕후이와 가까운 한 지인은 “독일의 한 언론이 그를 생존하는 세계 9대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그는 “별것 아니다”며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겸손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노동자 왕후이, 세계적 사상가 되기까지

왕후이는 공산당 지배체제와 무분별한 시장경제의 폐해를 우려하면서 점진적인 체제개혁을 주장해 왔다. 일부에서는 신좌파의 간판 인물 중 한 명으로 분류한다. 또 후진타오 체제의 조화사회론을 뒷받침하는 그룹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왕 교수 본인은 “합리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자신의 학문세계를 당파적인 색깔로 보지 말라는 얘기다. 그는 1992년부터 10여 년간 방문학자 자격으로 미국·영국·독일·일본의 유명 대학이나 연구소에 나가 서구 학자들과 교류했다.

“노동자 생활 계속 했어도 좋았다”
그는 대약진운동이 한창이던 59년 10월 양저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양저우사범대학에서 외국문학을 가르치던 교수였다. 문화혁명의 ‘10년 광풍’ 속에서 지식인 부모들은 박해를 받았다. 왕후이도 고교 졸업(76년) 후 공장노동자 생활을 했다. “2년간 세 가지 일을 해보았다. 통조림공장에서 고기를 섞는 일, 방직공장에서 천을 포장하는 일, 군용전화기를 조립하는 일이었다. 처음엔 13위안을 받았지만 초과근무가 많을 땐 30위안까지 받았다. 통조림공장에서 불량품이 생기면 그것을 싸게 팔았다.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어 행복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할 때 기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노동자 생활을 계속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고 답했다.

왕후이는 96년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황핑(黃平:현재 사회과학원 미국연구소 소장)과 함께 지식인들의 필독 잡지인 ‘독서(讀書)’ 주편(主編:편집장)이 되면서다. 36세의 젊은 나이였다. 왕 교수의 전임들은 천위안(陳原)·판융(范用)·선창원(沈昌文) 같은 중국 문화계의 거두들이었다. ‘독서’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4인방(四人幇)이 축출된 뒤 78년 ‘사상해방 진리추구’를 모토로 창간됐다. 창간호에 실린 “독서에는 금지구역이 없어야 한다(讀書無禁區)”는 글은 사상해방을 선언한 명(名)문장 중의 하나다. 독서의 필진은 각 분야를 대표하는 석학과 젊은 지식인이었다. 베이징대학의 한 교수(45세)는 “‘독서’를 읽지 않으면 대화에 끼기 어려워 공부 좀 한다는 사람은 멋으로라도 들고 다녔다”고 말했다(당시 발행량은 10만 부를 조금 넘었다).

서구의 公理, 유학의 天理와 비교도
왕후이는 ‘독서’ 주편을 맡기에 앞서 전임 주편들 앞에서 면접시험을 치렀다. 첫 문제는 그에게 전혀 생소한 ‘음운학(音韻學)’이었다. 그가 막힘 없이 줄줄 답하는 바람에 테스트는 그걸로 끝났다. 그의 천재성과 학구열만 확인해준 자리였다. 2년 전 왕후이가 주편 자리를 떠날 때도 떠들썩했다. ‘독서’에 대해 중국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국내외에 확산됐기 때문이다. 그는 11년간 중국의 나아갈 길에 대해 다양한 대안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컨대 러시아 개혁, 금융위기, 테러와의 전쟁, 삼농(三農), 의료·국유기업 개혁 등에 대해 관영 매체들과 다른 목소리를 냈다.

그는 지금까지 10여 권의 책을 썼다. 그중 4권으로 된 『현대중국사상의 흥기』를 통해 송(宋)·명(明) 유학의 원리부터 제국·국가, 근대 중국의 사상, 현대과학과 공동체 등을 설파하고 있다. 중국 유학의 ‘천리(天理)’와 서구의 ‘공리(公理)’를 비교·분석한 대목도 있다. 인문·사회과학의 융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후이는 곧 50세가 된다. 세계적인 대학자답게 학교 강의와 해외 학술행사를 빼곤 집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몰두하고 있다. 불가피한 약속이 있으면 집 근처에서 잠깐 만난다고 한다. ‘노력하는 천재 학자’의 무서운 면모를 피부 깊숙이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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