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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473.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제10장 대박

그 기억은 문득 한철규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서울에서 이틀째 밤, 그는 비로소 평온 속으로 아늑하게 가라앉는 자신을 느꼈다.

익숙한 것이 건네는 보상인 것 같았다.

"뭘 그렇게 열심히 내려다보고 계세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상념에 잠겨 있던 한철규가 고개를 들었다.

희숙은 어느새 두 개의 작은 유리잔에 가득 소주를 채우고 건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얼른 잔을 들어올리며 한철규는 눈짓으로 물었다.

"건배는 각자 속으로 하는 게 좋겠죠?" 그는 지난날 그 밥집에서 고주망태가 되었던 옛 직장 동료들을 위해서 건배했다.

빈 잔을 내려놓던 희숙은 이깟 소주 두 병은 끄떡없이 마실 수 있다며 묻지도 않은 생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그와 대작을 서슴지 않았던 희숙이가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이제 그들 옛 동료는 모두가 떠나가버렸고 추억 속으로 숨어버리고 말았다.

"중국으로 물건 부칠 때, 선생님도 투자하시는 거죠?"

"팔아서 마진율이 높은 거래라는 확신이 들면, 악어 입속이라도 두렵게 여기지 않고 손을 집어넣을 만큼 대담해야 줏대있는 상인이란 평판을 듣겠지요. 모험하지 않는다고 목구멍에 거미줄이야 치겠습니까만, 평생 큰돈 만지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이번의 거래는 중국 간 사람들의 능력이나 재량에 맡겨둬야 합니다.

겉보리 한 됫박만 가져도 처가살이는 말라 했듯이 하잘 것 없는 장돌뱅이 좌판이라도 혼자 꾸려갈 수 있으면 동업은 피하라는 게 장사꾼들 사이에서는 상식으로 통합니다.

종잣돈 날릴까봐 걱정돼서가 아니라, 자칫하면 소중했던 인생의 동반자를 잃어버리기 십상이지요. 여수가 질기고 셈이 흐린 사람이 누구라는 것은 대충대충 경험해서는 알아내기가 힘들어요. 성인군자연하는 사람도 돈에는 탐욕스럽게 마련이고, 셈이 밝았더라도 내 몫이 축난 것은 아닐까 해서 속을 끓이게 되니까요. 속을 끓이게 되면, 반드시 동업자를 곁눈질로 의심하게 되고 결국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 핏대가 곤두서서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북새통이 벌어지고 맙니다.

장사꾼이라면,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지켜야 할 것은 바로 신용인데, 동업자끼리 서로 헐뜯고 반목한다면 희숙씨 말처럼 집 안에서 새는 쪽박이 들에 나간다고 새지 않겠습니까. 신용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모두 잠꼬대에 불과하게 되겠지요. "

"선생님은 생각이 굴뚝 같아도 형부나 봉환씨가 반대할 것이란 얘기세요?" "봉환이나 형부가 배짱있는 장사꾼이라면 반드시 그럴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이런 경우 발버둥을 치더라도 혼자 꾸려가려 할 겁니다. 오늘 우리가 구입하기로 한 물건들은 중국 가져가면 날강도나 사기꾼을 만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남는 장사가 될 거예요. 이문이 눈앞에 보인다는 거지요. 내 눈에 보이는데, 장님 아닌 봉환이 눈에 보이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사정이 그런데 만원짜리를 반으로 찢어서 갖기를 바라겠습니까, 온전한 한 장 모두 갖기를 바라겠습니까? 희숙씨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저는 두말 할 것 없이 동업하겠어요. "

"장사꾼이란 사람들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

"아니에요. 저도 생각이 있는 걸요. 다른 보따리 장수들이 그런 물건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전에 많은 수량을 한꺼번에 갖다 팔아서 남 먼저 돈을 벌자면, 지금 봉환씨 자본으로는 태부족이겠지요. 선생님과 동업하게 되면, 우선 자본문제부터 쉽게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봉환씨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일텐데 반대할 까닭이 뭐예요. "

꿍꿍이속을 들여다 보면 한철규같이 설익은 장사꾼은 열을 잡아먹고도 트림 한 번 안할 여자였다.

속셈을 주저없이 토설하는 뱃심을 보아도 하찮게 볼 여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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