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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한가위 동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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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추석은 동산 위로 둥실 떠오르는 달과 함께하는 날이다. 어디서 보든 동동 보름달이건만 사람 마음은 한결같지 않다. 수많은 사연이 달과 함께 차오르는 추석.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고향 어른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나를 키워준 애기릉 마을이여, 이제는 사라져 버린 아름다운 산내들이여, 내가 이 세상 빛을 처음 본 그 마을 명절 정겨운 풍경이 바로 눈앞에 떠오른다.

애기릉 마을엔 추석 삼절(三絶)이 있다. 송편 토란국 송이산적이 그것이다. 연한 움쑥 뜯어다가 멥쌀과 섞어 곱게 빻아 끓는 물 붓고 반죽한다. 이것을 되직하게 치대어 매끄럽고 쫄깃쫄깃한 피를 만든다. 송편에 넣을 소로 맷돌에 간 청두팥을 물 부어 하룻밤 불리고, 붉은 팥을 껍질 벗겨 물로 헹궈 거피한 뒤 찜통에 푹 찐다. 뜸이 들면 소금 넣고 주걱으로 으깨면서 어레미에 내려 약한 불로 볶다가 계핏가루를 넣는다. 이 팥고물을 작고 둥글게 쥐어 소를 만들어, 송편에 넣은 뒤 손으로 반달모양 오므려 대나무 소반에 열을 따라 놓는다. 시루에 솔잎 깔아 그 위에 빚은 송편 늘어놓고 다시 솔잎 덮어 가며 켜켜이 놓고 찐다. 솔잎 향기는 맛에 운치를 더한다.

추석날 아침상, 어김없이 토란국이 올라온다. 우선 동글동글한 토란 알맹이 껍질을 잘 벗겨 깨끗이 씻어 먹기 좋게 자른다. 쌀뜨물에 소금을 조금 넣고 쪼갠 토란을 폭폭 삶는다. 한편에선 양지머리를 고아 맑은 장국을 끓인다. 줄기째 익힌 다시마와 삶은 토란과 푹 곤 양지머리 고기를 간장에 무쳐서 장국에 넣고 소금 간을 맞추어 먹는다. 토란국은 영양도 많고 맛이 부드러워 한가위 별미다. 음식이 지천인 한가위, 과식했을 땐, 이 토란국 곁들이면 속을 부드럽혀 주며 소화를 돕는다.

그즈음이면 소나무 우거진 솔밭 그늘 낙엽 쌓여 축축한 땅을 불끈 밀고 송이버섯이 봉긋봉긋 올라온다. 송이버섯은 향기가 독특하고 맛도 좋아 갖은 요리에 쓰인다. 밥을 지을 때 송이를 썰어 넣고 버무려 향기를 돋운 밥을 송이밥 송이반(松<682E>飯)이라 한다. 길쭉길쭉하게 쪼갠 송이와 송이 크기만큼씩 썬 고기, 거기에 기름 치고 후춧가루 뿌린 파를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 구워내면 송이산적이 된다. 길쭉길쭉 쪼갠 송이를 장과 기름 그리고 후춧가루에 버무려 역시 꼬챙이에 꿰고 녹말을 묻힌 다음 달걀을 씌워 지진 적을 송이누름적, 꽃향기 난다 하여 송이화향적(松<682E>花香炙)이라 한다.

한가위 달은 언제나 무척 아름다웠지. 눈을 가로막는 아파트 답답한 건물 사이 좁은 공간일지라도, 달빛이 스며든다면, 그 달빛을 가르고 밤새 한 마리 날아간다면, 그리하여 그 달빛이 내 가슴에서 출렁거린다면, 내 영혼에 잠들어버린 향수를 깨어낼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사람의 아버지로 세상에 끊임없이 흔들리다 사라져가는 내 마음자리는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그곳이 과연 내 마음 깊은 곳에 어쩌다 떠올라 일렁이는 나 어릴 적 저 애기릉 마을인가. 둥근 달을 애기릉 마을사람들은 “참, 밝기도 해라!” 감탄하며 잠 못 이루고는 했었지. 누가 아프면 마을 사람 모두 걱정하고, 죽으면 섭섭히 여겨 눈물 보태고, 나날의 생활 서로 아껴주는, 그런 착한 이들이 살아가는 내 고향 애기릉 마을, 그리운 추석삼절 한가위 동동 저 달이여.

고정일 소설가·동서문화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