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처럼 얽힌 현실과 비현실…하일지 신작 '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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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소설가 하일지 (44) 씨가 신작 장편 '새' (민음사) 를 내놓는다.

평생에 걸쳐 10권 분량으로 완간할 예정이라는 '하일지판 아라비안나이트' 의 전반부를 일간지에 연재했던 일을 열외로 한다면, 신작은 4년만이다.

10년전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데뷔작 '경마장 가는 길' 의 극단적 사실주의 기법으로 독자들에겐 신선한 충격을, 문단엔 일대 논쟁을 제공했던 그는 이제 흡사 '뫼비우스의 띠' 같은 환상적 현실로 새로운 소설을 선보인다.

증권회사에서 퇴출당한 40대 중년사내인 주인공 'A' 의 주변은 그의 전작에서 이니셜로 등장한 다른 모든 주인공들처럼,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다.

아버지는 치매에 걸렸고, 아내와 아이들은 자신의 말에 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직장 부하였던 정부 (情婦) 는 소파수술을 받아야할 처지다.

작가는 이런 A를 도쿄호텔 엘리베이터에서 길을 잃게 만들고, 그럴듯하면서도 비현실적인 '남천' 이란 지명의 고향 아닌 고향으로 안내한다.

그를 '도련님' 이라 부르는 남천사람들은 A를 실지회복을 위해 돌아온 지역 세도가 자손으로 대접하고, 어리둥절해하던 A도 아내를 자처하며 품에 안겨드는 여자의 고운 매력에 빠져 이 역할에 만족하기 시작한다.

작가 특유의 '잘 읽히는' 단문 (單文) 덕에 이같은 소설의 중반부까지 무던히 따라오기는 했지만, 어리둥절하기는 독자도 마찬가지. 현실에서 남천으로 가기까지 작가가 깔아놓은 다단계 환상의 고리들은 A가 다시 한번 엘리베이터안에서 길을 잃는 소설 후반부와 교묘한 대칭으로 맞아떨어지면서 비로소 제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A와 호텔방에서 몸을 섞은 연인은 분명 '지영' 이었지만, 남천의 아내와 지영의 룸메이트 정희가 저마다 그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우기는 식으로 소설 곳곳에는 A가 인식하는 현실을 혼돈시키는 장치가 반복된다.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하 듯 자신의 존재가 현실로부터 실종되어가는 것을 느끼던 A는 간신히 자기집을 찾아가지만 엉뚱한 남자가 주인노릇하는 '현실' 과 마주칠 따름이다.

지난 학기부터 동덕여대 교수로 임용돼 "소설가라는 현실주의자와 교사라는 이상주의자를 겸업하게됐다" 고 근황을 전한 작가는 " '경마장…' 의 극도로 객관적인 묘사가 의식세계의 사실주의였다면 '새' 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실주의" 라고 말했다.

소설 속에는 은행에는 절대 돈을 맡기면 안된다는 장님 남매의 말을 납득하지 못하던 주인공 A가 파산위기의 은행들이 지불정지 선언을 내거는 것을 보고 경악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IMF전후로 마치 '꿈' 과 '악몽' 을 번갈아 꾼 듯한 99년의 독자들에게 작가는 현실과 환상을 교묘하게 병치해 자신이 던지는 질문의 무게를 증폭시킨다.

자, 과연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의 경계는 무엇일까.

한국소설의 경계를 넓혀왔다고 자부하는 작가는 "새롭지 않다면 소설은 가치가 없다" 고 말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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