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 해야지 (2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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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28) '4.19'와 군 출동

"따르릉" .1960년 4월19일 오후 3시가 막 지났을 무렵 6군단장실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김종오 (金鍾五) 육군참모차장이었다.

그는 이유도 대지 않은 채 다짜고짜 나에게 "6군단 소속 전차 1개 중대를 서울로 출동시키라" 고 했다.

순간 나는 그게 '학생들의 시위 진압작전 출동' 임을 직감했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번져가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4월11일 마산에서 시위도중 사망한 김주열 (金朱烈) 군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데모는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됐다.

18일에는 중앙청 앞에서 데모를 끝내고 귀가하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깡패들의 난데없는 습격을 받았다.

그 사건으로 학생 수십명이 부상했다고 했다.

위기감을 느끼게된 정부는 마침내 19일 오후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경비계엄을 선포했다.

내가 맡고 있는 6군단 (포천) 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부대였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든 부대가 출동하는 사태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金차장에게 "야, 탱크 동원은 힘들어. 서울로 출동하자면 의정부를 통과해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포장도로도 다 망가질 것이고…" 라며 핑게를 둘러 댔다.

그러자 그는 "이봐, 이런 비상시국에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이건 계엄사령관 (宋堯讚) 명령이야!"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 대고 나도 지지 않고 "야 그럼 탱크로 학생들을 깔아 뭉개버리겠다는 거야, 기관총으로 쏴 죽이겠다는 얘기야?" 하고 소리를 질러 주었다.

그러자 金차장은 더 이상은 출동을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전화를 끊어버렸다.

요즘 장교들이 볼 때는 잘 이해가 안 될지 모르지만 김 장군과 나는 같은 학병 출신으로 일찍부터 말을 트고 지낸 사이였다.

그 바람에 출동명령은 결국 15사단에 떨어졌다.

가평에 주둔하고 있는 15사단은 1군 사령부 예하부대로 조재미 (趙在美) 준장이 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1만5천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출동하기 전 趙장군은 두 가지 상반된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사태가 여의치 않을 경우엔 발포해도 좋다' 는 계엄사령관 (송요찬) 의 명령과 '절대로 발포해서는 안된다' 는 직속상관 유재흥 (劉載興) 1군사령관의 명령이 그것이었다.

서울로 출동한 趙장군은 먼저 탱크 1개 중대를 포함한 15사단 병력을 고려대학교 인근 중랑교에 주둔시켰다.

장병들에게는 'M1소총에 착검 (着劍) 은 하되 칼 끝은 반드시 하늘 쪽으로 두도록' 명령했다.

그것은 군이 시위군중에게 '적대감이 없음' 을 나타내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 다음 19일 오후 趙 장군은 부관을 데리고 고려대로 갔다.

그곳에는 1천6백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농성중이었다.

교내로 들어간 그는 시위 도중 경찰 발포로 숨진 학생의 시신이 안치돼 있다는 강당으로 향했다.

趙장군은 별이 새겨진 철모를 벗은 다음 희생자에게 경건한 조의를 표했다.

이 모습을 지켜 본 학생들은 격앙된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순순히 정부와의 협상에 나섰다.

지나간 얘기지만 趙 장군은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내가 육본 인사국장으로 있을 때다.

일선에 나갈 연대장을 선발해야 하겠는데 당시 대부분의 장교들은 이런저런 핑게로 차출을 피했다.

그런데 전방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된 趙 대령이 흔쾌히 자원하고 나섰던 것이다.

나는 4.19가 군에 의한 대규모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었던 것도 趙장군의 평소 인격과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6군단에서는 전혀 다른 사태가 전개되고 있었다.

출동명령을 피한 후 나는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별다른 후속 명령이 없어 내심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오후 5시쯤 됐을까. 전속부관 이경빈 (李慶玭) 대위가 급히 뛰어 들어와 나에게 이렇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기붕 (李起鵬) 의장이 탑승하신 차가 방금 군단 사령부 정문을 통과했습니다. "

글 = 강영훈 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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