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가수들 "TV푸대접 설움 사회봉사로 달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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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지난 1일 오후 서울 종로 탑골공원. 노인들을 위한 흥겨운 잔치마당이 벌여졌다. 무명가수들이 홀로 사는 노인 3백여명을 초대해 노래도 부르고 음식도 대접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노인들이 몰려 음식다툼이 일어나는 해프닝도 있었다.

공연을 준비한 사람들은 지난달 초 결성한 '홀로서기 가수회' (회장 태민) .라디오에선 노래가 자주 소개되나 TV에선 거의 얼굴을 보기 힘든 가수 13명이 모여 만들었다.

대부분 트로트.발라드 풍 가수들이다. 여자도 두 명 포함됐다. 매니저도 없이 오로지 혼자 힘으로 버텨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노래를 통한 사회봉사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일과가 재미있다. 1년 3백65일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방송국에 출근한다. 물론 녹화가 있어서가 아니다. 방송사 음악담당 PD들에게 얼굴을 계속 알리면서 한 두 차례라도 TV 전파를 타기 위해서다. 집안에 경조사가 있어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곤 매일 반복되는 일이다.

이들은 하루에 평균 6개 정도의 방송사를 순례한다. 아침 10시경 한 방송사에 모여 다른 방송사로 이동한다. 오늘 KBS에서 시작했으면, 내일은 MBC에서 모이는 식이다. 이렇게 대략 오후 6시까지 방송사를 돌고 난 후에는 각기 생업의 현장인 밤무대에 오르기 위해 흩어진다.

TV가 철저하게 스타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때 이들은 방송에서 '소외된' 사람들. 더욱이 많은 가요 프로가 10대를 축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이들이 설 자리는 더욱 좁은 상황이다.

KBS의 '가요무대' '전국노래자랑' , 혹은 '아침마당' 을 통해 1년에 적게는 한 번, 많게는 5번 정도 출연한다.

하지만 경력만 놓고 보면 이들을 마냥 무시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 대부분 10년 이상 작사.작곡도 병행하며 노래를 부르면서 지내왔다. 나이도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집중됐다. 오직 노래가 좋아 지금까지 버텨왔다.

이들의 구상하고 있는 계획은 대략 두 가지. 첫째, 두 달에 한번 꼴로 소쩍새 마을 같은 지방의 불우시설을 찾아 흥겨움을 선물할 계획이다.

또한 서울의 구청 10개 정도를 선정해 그곳에 거주하는 가난한 사람이나 소년 가장들에게 일정액의 생활보조금을 지급할 예정이다. 또한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이면 지방단위로 개최되는 각종 이벤트 행사도 꾸려나갈 준비도 하고 있다.

회장 태민씨는 당찬 모습도 보인다. "앞으로 일본문화가 개방되면 우리의 입장이 유리해질 수 있어요. 일본 엔카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우리 성인가요가 아닐까요. 그런 날을 미리 대비하자는 뜻도 있습니다. "

TV에선 외면당하지만 노래에선 결코 물러날 수 없다는 그들의 고집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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