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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영생하는 선각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898년 서재필 (徐載弼) 은 두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1884년 갑신정변 (甲申政變)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한 지 11년만에 귀국한 서재필은 '독립신문' 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하는 등 개화 (開化)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수구파 (守舊派) 정부를 비판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을 공격함으로써 이들로부터 미움을 사 국외로 추방당한 것이다.

미국에 돌아온 서재필은 전공인 의학으로부터 오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의사 일로 돌아가자면 다시 의과대학에 들어가야 할 처지였다.

그때 인쇄업을 하던 친구의 권유로 필라델피아에서 문구상과 인쇄소를 시작했다.

그후 사업이 번창해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서재필의 머릿속엔 조국의 어두운 현실이 항상 떠나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재필은 다시 일어섰다.

그해 4월 필라델피아에서 전미 (全美) 한국자유인대회를 소집했다.

상하이 (上海)에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 임시정부 구미위원회 사무실을 열었다.

22년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각국 대표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고, 25년 하와이에서 열린 범태평양회의에 참석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를 규탄했다.

이동안 서재필은 사업을 거의 돌보지 않았고, 활동자금은 사재 (私財) 로 채웠다.

그 액수가 당시로선 거금인 8만달러나 됐다.

그 결과 서재필은 파산하고 말았다.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의사가 되는 길뿐이었다.

26년 62세 나이로 펜실베이니아대에서 2년간 공부한 후 몇개 종합병원 병리학실에서 일한 다음 36년 펜실베이니아주 체스터에서 개업했다.

47년 서재필은 미 군정청 수석고문 자격으로 귀국했다.

일부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할 움직임도 있었으나 미국 시민이란 점이 문제가 돼 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미국으로 돌아왔다.

말년의 서재필은 곤궁했다.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지병인 방광암으로 고통받았지만 입원비가 없어 병원에 입원도 못한 채 51년 1월 5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필라델피아 자유메달' 수상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필라델피아 교외 미디어에 위치한 서재필기념관을 찾았다.

그리고 방명록에 "선각자는 영생합니다" 라고 적었다.

한국 현대사에 우뚝 선 거목 (巨木) 으로 생전에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겪었던 선생에게 작은 위안이 됐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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