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되살아 나는 토종 ① 흑돼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22일 송학농장에서 이석태씨가 태어난 지 8일된 흑돼지 새끼를 들어 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씨암탉·흑돼지·붉은여우·칡소….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이 땅에는 우리의 모습과 심성을 닮은 토종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함께 토종은 외래종에 밀려 도태의 길을 걸어왔다. 하나의 종이 멸종하면 이와 연관된 문화도 함께 사라진다고 사회학자들은 주장한다. 토종은 신토불이다. 우리 고유의 자산이기도 하다. 토종을 지키고 복원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노력을 찾아간다. 

22일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학전리 송학농장. 산 중턱 3만여㎡에 들어선 돼지 사육 농장이다. 이곳엔 돼지 4000여 두가 있다. 이 가운데 400여 마리는 검은색이다. 이들 흑돼지는 고기를 얻기 위해 키우는 육돈이 아니다. ‘한국재래돼지’로 명명된 토종 흑돼지의 종돈이다.

토종 흑돼지는 고구려 시대에 중국 북부에서 사육되던 돼지들 중 몸집이 작은 재래종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몸 전체가 빛이 나는 검은색의 털로 덮여 있으며 얼굴이 좁고 주둥이가 길다. 귀는 작으며 위로 솟아 있다. 외국종에 비해 몸집이 작다.

“본래 이 땅에는 몸집은 작지만 맛있는 흑돼지가 있었습니다. 1900년 무렵 검은색 버크셔가 들어오면서 잡종화가 시작됐어요. 광복 이후엔 흰색 요크셔가 들어오고,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 속도가 느린 우리 돼지는 점차 도태됐습니다.” 송학농장 이석태(60) 대표의 설명이다.

맛은 간 곳 없고 생산성이 새로운 사육 기준이 된 것이다. 이 대표는 “언젠가는 우리 것을 복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대학 시절부터 했다”고 말했다. 그는 영남대 축산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축산에 뛰어들었다. 양돈으로 돈을 벌고 축협조합장도 지냈다. 1990년대 들어 더 늦기 전에 토종 흑돼지를 복원하자며 대학 동기인 영남대 여정수(59) 교수를 찾았다. 여 교수는 유전자(DNA) 추적을 통한 육종을 전공하고 있었다.

이 대표는 92년부터 제주·전북 남원·지례(경북 김천) 등지를 돌며 토종 흑돼지를 수집했다. 65년 전 일본 학자가 조사해 남긴 지례돼지의 기록을 토대로 했다. 전국에서 수집한 흑돼지는 1차로 교배를 통해 5대에 걸쳐 혈통을 고정했다. 털 색깔이 다르거나 토종의 특성을 벗어난 2세는 제외했다. 96년부터 여 교수는 토종 흑돼지 고유의 DNA 표식을 찾는 연구에 들어갔다. 이 연구를 통해 토종 흑돼지 고유의 유전 형질 8개를 발굴했다. 토종 흑돼지의 DNA가 처음으로 정립된 것이다.

2000년대 중반부턴 혈통이 고정된 흑돼지 4000여 두를 사육했다. 보존을 위해 경북도 축산기술연구소에도 흑돼지를 보냈다. 토종 흑돼지 전문음식점을 통해 산업화도 시도했다. 흑돼지의 뛰어난 맛 하나를 믿은 것이다. 토종 흑돼지는 쫄깃쫄깃하고 씹을수록 고소한 데다 돼지 특유의 누린내가 없다고 한다. 콜레스테롤 함량이 개량종에 비해 낮고 몸에 좋은 불포화지방산은 상대적으로 훨씬 많다는 게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이 대표는 “한때는 흑돼지만 키웠는데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 없어 종돈만 남기고 지난해 모두 개량종으로 바꿨다”며 “문제는 가격”이라고 털어놨다. 토종 흑돼지도 한우와 수입 쇠고기 값이 차이 나듯 일반 돼지고기보다 비싸야 하는데 국내 유통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6년간 포항·대구 등지에서 운영한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부채만 떠안은 채 지난해 연말 모두 청산했다. 토종 흑돼지에 매달리다 그동안 모두 25억원 정도를 날렸다고 한다.

실제로 이 대표의 농장에서 어미 흑돼지들은 개량종 축사의 한 귀퉁이로 밀려나 있었다. 개량종은 5개월이면 110㎏에 이르러 출하된다. 하지만 토종 흑돼지는 9개월이 지나도 80㎏에 그친다. 토종은 성장 속도가 느려 그만큼 생산성이 떨어지는 셈이다.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합니다. 여러 나라 돼지고기를 맛보았지만 우리 흑돼지를 따라오지 못해요. 국민소득이 4만 달러쯤 되면 비싼 한우를 선호하듯 비싼 흑돼지를 사 먹을 날이 올 겁니다.”

이 대표의 아들 한보름(31)씨는 돼지농장에 묵으면서 포항테크노파크 연구원으로 일한다. 그도 대를 이어 축산학을 공부하고 흑돼지로 석사 학위를 땄다. 지난달엔 토종 흑돼지의 유전전 표식을 특허 등록했다. 한보름씨는 “앞으로 DNA를 더 찾아내 토종 흑돼지를 한국을 대표하는 가축 품종으로 개발할 계획”이라며 “국가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포항=송의호 기자 , 사진=프리랜서 공정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