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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평양과기대는 기적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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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 그러나 평양은 강제 추방했던 김 총장을 다시 초청했다. 그리고 2001년 5월 2일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이사장 곽선희 소망교회 원로목사, 이하 재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교육성 사이에 평양과학기술대학 건립계약서가 정식으로 체결돼 이듬해 6월 12일엔 평양시 남쪽 낙랑구역의 100만㎡ 대지 위에 평양과기대가 착공됐다. 그후 7년의 세월이 흘렀다. 마침내 지난 16일 대학본부동, 학사동, R&D센터, 종합생활관, 기숙사 등 총 17개 동에 걸쳐 연건평 약 8만여㎡에 달하는 교육장과 국제수준의 화상세미나실 및 영상강의실 등을 갖춘 평양과기대의 1차 준공식과 총장(김진경) 취임식이 성사됐다.

# 평양과기대의 시설 및 학사관리 등을 포함한 실질적 학교운영은 남측의 재단과 북측의 교육성이 향후 50년간 공동으로 수행하도록 건립계획서에 규정돼 있다. 물론 그 기간은 연장 가능하다. 하지만 북측은 이렇다 할 인력도 재원도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남측과 해외로부터의 교수 임면권과 산학협력단지 조성 및 전반적인 학사운영권은 재단과 김 총장이 떠맡을 수밖에 없다. 결국 평양과기대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 우리의 재량권 아래 상당 부분 움직이는, 한마디로 평양의 심장에 박힌 ‘기적 같은 공간’이다.

# 평양과기대는 학부와 대학원을 둘 수 있도록 건립계약서에 명기돼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대학원 중심대학이다. 북한에서는 대학원을 박사원이라 부른다. 결국 평양과기대는 학부를 졸업한 북한 영재들이 석·박사 과정을 밟는 과학기술박사원으로 출발하고 또 발전할 것이다. 게다가 강의는 전부 영어로 진행된다. 평양과기대는 올겨울부터는 실질적인 강의가 이뤄지도록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우선 북한의 식량난 해결에 도움을 줄 농생명식품 분야부터 강좌를 개설하고 뒤이어 정보통신과 산업경영 및 보건의료 분야로 강좌를 확장시킬 계획이다. 아울러 국내외 기업들이 참여하는 산학연계 프로젝트도 가시화할 예정이다. 카이스트가 대한민국을 바닥에서 일으켜 세워낸 바탕 힘이었던 것처럼 평양과기대도 북한을 살리는 바탕 힘이 될 것이고 또 돼야 한다.

# 일각에서는 평양과기대가 북한의 체제 유지에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평양과기대는 북한 체제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같은 민족구성원으로서의 북한의 미래를 살리는 요람이 될 것이다. 북한을 다 죽여서 통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이다.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줘야 한다. 소금 먹은 쥐가 물로 가는 법이다. 핵을 뱉으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실리의 소금을 먹여 뱉도록 유도함이 백번 옳다. 그런 의미에서 평양과기대는 단지 또 하나의 대학이 아니라 남북한 공동번영의 미래를 향한 작지만 분명한 숨구멍이다.

# 평양과기대는 존재 그 자체가 기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뚫어야 할 난관이 적잖고 넘어야 할 산 또한 많다. 컴퓨터 등 연구기자재의 북한 내 유입이 유엔 및 미국의 대북제재로 벽에 부딪혀 있다. 남측 교수요원의 장기 평양 거주에 따른 문제도 풀어야 한다. 또 매달 만만치 않게 소요될 대학운영비의 확보도 비상이다. 하지만 평양의 심장부에 지펴진 소중한 기적의 불씨를 꺼뜨릴 순 없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지혜와 역량을 새롭게 모아낼 때다.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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