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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의 희망찾기] 9. 금강산에 울다 (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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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해에서 남북이 불을 뿜던 날 나는 동해 뱃길로 금강산을 다녀왔다.

내 인생을 통째로 짓눌러온 분단, 꿈에서도 몸 떨리던 북한 땅을 조용히 가슴으로 밟아보고 싶었다.

"지금 우리는 금강산 관광을 가는 것이 아니라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통일로 가는 역사 위에 올라 서 있는 것입니다. " 강만길 교수님이 한 말의 울림을 느끼며 봉래호에 몸을 실었다.

배 위에는 자녀들이 효도관광을 보내줘서 왔다는 주름진 노인들이 많았다.

기왕이면 굶주린 북한 동포들에게 도움이 되는 신혼여행을 하자고 나선 젊은 쌍들,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온 성직자들, 관광선을 타고서라도 고향땅을 밟아 보겠다는 실향민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순전히 금강산 유람이 목적인 듯한 아줌아.아저씨들이 시끌벅적 들떠 있기도 했다.

저마다 다른 사연과 생각으로 한 배에 오른 사람들. 그럼에도 "우리는 한 배를 탔다" 는 말이 새삼 절실하게 다가왔다.

북으로 북으로 달리는 배의 갑판 위에서 붉은 노을이 지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유유히 스쳐 지나가는 파도, 뱃전에 부서지는 하얀 물살, 갈매기가 날고 멀리 고깃배들이 평화롭게 귀항하고 있었다.

작은 연못 같은 동해 바다를 벗어나 저 광활한 북태평양을 향해 이대로 몇 날 밤이고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남북분단은 대륙으로 가는 길만 끊어 놓은 것이 아니라 해양으로 가는 상상력도 막아 놓은 것이었다.

땅 위에서만이 아니라 바다에까지 경계를 긋고 철조망을 쳐 놓은 인간들. 우리는 반세기 동안 세계에서 단절되고 고립된 채 분단된 섬에 갇혀 살아온 셈이었다.

오전 3시쯤, 배는 고동조차 울리지 않고 바다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나갔다.

반세기 동안 가로막힌 시공의 두께는 그렇게 간단히 뚫어지고 마침내 북한 영해였다.

아침. 드러났다.

설마 했던 것들이. 처음 본 북한 땅. 퇴색하고 가라앉은 잿빛 항구.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은 곳. 태고처럼 무거운 정적. 장전항은 북한 해군의 최전진 기지라고 했다.

그때였다.

아침 바다를 가르며 50여 척의 북한 어선들이 나타났다.

낡을 대로 낡아 검게 녹슨 작은 배들. 제 힘으로는 도저히 멀리 갈 것 같지 않은 느릿한 행렬. 그르렁거리며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불안한 엔진소리들. 작은 어선에 너무 많이 타고 있는 남루한 옷의 어부들. 배도 사람도 옷도 온통 어두운 빛인데 색깔이라곤 뱃전에 꽂은 빛 바랜 붉은 깃발뿐.

타이타닉처럼 호화로운 초대형 관광선 갑판에서 내려다보는 원색의 사람들과 마주 쳐다보는 저 낡고 녹슨 배 위에 쭈그려 앉은 무채색의 사람들. 경제성장이 제일이라고 마구 개방해서 자기 줏대를 잃어가는 화려한 반쪽과 민족주체성을 내걸고 철저히 닫아걸어 앙상하게 퇴색해버린 반쪽. 이토록 선명한 대비가 있을까. 이토록 비극적인 상면이 있을까. 나는 굳어진 얼굴로 장전항 부두에 첫 발을 내딛었다.

"암스트롱은 달나라에서 왼발을 먼저 내려놓았다는데 박선생님은 북한 땅에서 어느 발을 먼저 딛었어요?" 남쪽 안내원의 농담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금강산 가는 길은 철조망 길이었다. 장전항에서 온정리로 관광버스가 달리는 길을 따라 양편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여기까지도 분단이었다.

현대자본은 이 폐쇄된 땅을 뚫고 철조망 사이로 이른바 '현대회랑 (回廊)' 을 구축하고 있었다.

50년 걸려서야 휴전선은 여기까지 후퇴한 셈인가.

나는 사회주의 북한 땅에 와서 자본의 위력을 전율하며 실감했다.

도로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북한 병사들이 권총을 찬 채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굽이굽이마다 불쑥불쑥 나무토막처럼 굳은 표정으로 버스만 응시하고 서 있는 군인들.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무표정한 저 모습. 차라리 적개심이나 냉소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저 무표정한 얼굴. 인간의 표정이란 그가 사는 공동체의 분위기를 집약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의 체험과 감성과 지성이 삶 속에서 무르익어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저 앳된 군인들의 굳고 무표정한 얼굴 뒤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가.

나는 그 무표정 앞에서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철조망 너머로 온정리 마을이 보였다.

마을을 에워싼 산들은 민둥산이었다.

쓸 만한 나무를 다 패버리고 다락밭을 만들어 놓은 게 눈에 들어왔다.

논이건 밭이건 땅은 푸실푸실 힘이 없어 보였다.

땅에서 자라는 작물도 그 땅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느릿느릿 힘이 없어 보였다.

힘있는 건 오직 무기와 군인들과 구호뿐이었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자력갱생" "강성대국" "심장을 바치자 어머니 조국에" .그러나 그 힘 있어 보이는 것들조차 가만히 들여다보면 속이 허한 슬픔이었다. "이곳은 관광특구라 형편이 나은 셈이지요. " 연변 조선족 출신 운전기사가 귀띔했다.

밭을 매는 아낙네들,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가는 사람들, 들것으로 돌을 나르는 사람들, 모두가 생기가 없었다.

학교 다닐 나이의 아이들은 무얼 찾는지 보퉁이 하나씩을 들고 헐벗은 동산과 개천과 들을 헤매고 있었다.

빛 바랜 사진첩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모습들. 새 천년을 앞둔 '같은 시간' 에 이렇게 '다른 시간' 을 살고 있는 사람들. 그 암울한 회색 공간을 가로지르며 산뜻하고 세련된 빛깔의 최신식 현대관광버스 50대가 줄지어 달리고 있었다.

철조망을 가운데 두고 회색의 북한 주민들과 원색의 남한 관광객들이 서로 동물원 구경하듯 하고 있었다.

마치 서로 다른 생물종을 대하는 듯 낯섦과 호기심과 묘한 경계심이 뒤얽힌 시선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날 수 없는 '사파리 관광' 이었다.

마침내 금강산에 올랐다.

금강산은 금강산, 감히 상상조차 허락하지 않은 산이었다.

나는 만물상.옥류동.구룡폭포 가는 길을 두발로 걸어서가 아니라 오체투지 (五體投地) 로 절하며 가고 싶었다.

옛 사람들이 "제 아무리 악한 사람도 금강산엘 다녀오면 착한 본성이 찾아든다" 고 했다더니, 과연 금강산은 절경이었고 민족의 영산이었다.

가파른 바위 계단을 숨차게 오르고 올라 마침내 상팔담에 섰다.

상팔담 전망대 가장 높은 바위에 올라 내려다보았다.

아득한 낭떠러지 아래 거대하게 누워 있는 하얀 암반, 그 사이 사이 눈이 시리게 푸른 연못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여기가 그 유명한 선녀와 나무꾼의 설화가 나온 곳이라 했다.

팔선녀가 내려와 목욕했다는 여덟개의 푸른 연못이 줄지어 흐르다 구룡폭포로 쏜살같이 떨어져 내렸다.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하면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넘나드는 것일까. 문득 그 황홀한 연못을 향해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저 아득한 낭떠러지로 내 몸을 던지면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그만 어깨에 날개가 돋아 훨훨 선계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홀려버린 정신을 가다듬어 고개를 들어 보니, 아 거기 또 한 세계.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이 장엄하게 흰 이마를 빛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월출봉, 일출봉, 멀리 만물상이 첩첩으로 둥그렇게 감싸고 있었다.

이 깊고 깊은 산. 더는 깊어질 수 없어 온 세상을 다 품에 안아버릴 듯한 우리들 마음의 산. 기나긴 분단의 시간, 완강한 인간의 제도를 뚫고 뚫어서 기필코 열어가야 할 우리의 미래상이 아닌가.

상팔담에 앉아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잊어버렸다.

사무치는 아름다움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이 솟아 흘렀다.

환희심의 눈물, 맑고 뜨거운 슬픔의 눈물. 나는 다시 가파른 현실로 내려와야 했다.

상팔담 건너 동산만한 흰 바위에 "금강산은 조선의 기상입니다" 라고 엄청나게 크고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순결한 금강산의 가슴팍에 꽝꽝 글씨를 못박는 저 담대함. 비바람이 지운다면 아마도 천년 만년은 걸리리라. 불멸의 새김, 불멸의 욕망. 갑자기 내 가슴팍에 쇠정을 꽝꽝 박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적.막.강.산!

아, 다시 보니 금강산은 죽은 산이었다.

금강산에는 사람이 없었다.

산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람이 있고 추억이 있어 명산이 아닌가.

금강산을 전세내 버린 울긋불긋한 차림의 남쪽 관광객들만 오르내릴 뿐, 이 좋은 산천에 놀러온 북한 주민은 단 한 사람도 볼 수가 없었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말이 몸서리치게 다가왔다.

굶주린 산천에 앉아 현대에서 나눠준 보온 도시락을 열었다.

눈물은 아래로 흘러도 밥숟갈은 위로 올라간다더니. 그날 저녁 배로 돌아와서 난생 처음으로 폭탄주라는 걸 마셔보았다.

취하고 싶었다.

마구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몇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검은 수평선이 밝아올 때까지 나는 바람 찬 갑판을 걸어다니며 울었다.

(다음 주에 下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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