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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음악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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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막 짐을 정리하고 잠시 한숨을 돌리고 나서 “이제 무엇을 할까” 하고 망설였다. 잠자기에는 너무 이르고 빅토리아대학 기숙사 안에는 카페나 커피숍도 없는 것 같았다. 책을 읽자니 기분이 좀 떨떠름했다. 독서는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 먼 이국땅에서의 첫날 밤을 독서로 보내려니 내심 뭔가 불만스러웠다. 싱숭생숭하던 그 무렵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누굴까?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텐데….”

문앞에는 벽안의 한 소녀가 서 있었다. 가슴에 하프를 껴안고 엄마처럼 보이는 여성과 함께. 소녀의 엄마가 말했다. 스웨덴에서 왔는데 딸이 국제청소년행사에 참가한 친구들에게 작은 선물을 가져왔노라고. 복도의 문을 열고 문앞에 의자를 놓았다. 행사에 참가한 우리 청소년 4명을 불렀다. 소녀는 한국에서 온 또래들과 인사를 나누고 하프를 켰다.

연미색 연주복을 입고 하프를 켜는 소녀와 미소를 머금은 엄마를 보면서 선율을 듣노라니 말보다 풍부하고 섬세한 교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잠시 동화의 나라에서 신화를 들었다. 연주를 마친 소녀는 명함 대신 작은 기념품을 남기고 떠났다. 그 덕분인지 행사 기간 동안 이방인처럼 떠돌지 않고 낯선 사람들과 편안한 마음으로 잘 지냈다. 선율은 사라졌으나 이미지와 감동은 여태 남아 있다.

음악이 훌륭한 선물임을 깨닫고 나서 연주나 노래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훌륭한 영화음악은 영상의 극적 효과를 높이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는 독립된 창작물로 남아 팬을 부른다. 파리의 센 강변에서 웃통을 벗고 북을 연주하는 아랍계 젊은이는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리듬을 선사하고 답례품으로 돈을 받는다. 답례품을 자기가 쓰면 프로페셔널이 되고 남을 위해 쓰면 천사가 된다.

지난여름 영동 고속도로 여주휴게소에서 음악의 천사들을 만났다. 백혈병 어린이를 돕는 한소리였다. 3인조 밴드는 70·80세대들이 좋아하는 유행가들을 불렀다. 누가 얼마나 오랫동안 들을까마는 어린이들이 자주 모금함을 찾았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경기도공무원들이었다. 10년 동안 격주로 자선공연을 열어 대학병원을 통해 1억원 이상의 치료비를 어린이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들은 연습실도 없고 연주복도 없지만 사랑의 화신이었다.

천사가 아닌 사람들도 일상에서 음악을 선물할 수 있다. 가무에 대한 우리 민족의 선호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기록될 만큼 남다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생활문화 속에 노래방이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전 국민의 가수화도 멀지 않았다. 아직은 노래방 문화가 여흥을 즐기고 스트레스를 푸는 수준이지만, 그래서 노래를 부르는지 악을 쓰는지 구분이 안 되고 남이 노래할 때 나는 노래책을 찾는 등 어수선하다.

노래방에 갈 때마다 고민스럽다. 철저히 망가지면서 스트레스를 풀까, 아니면 내 마음이 담긴 노래를 선물할까. 친구 손을 잡고 노래방에 가자고 청하면서 “노래 한 곡 선물할까”라고 말하면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볼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생각하는 대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안 하던 짓을 해볼 수도 있겠다. 피아노를 치고 하프를 켜는 천사가 아니라도 일상의 노래를 선물할 수는 있으리라. 친구들에게 스트레스를 줄 것인가, 아니면 정성을 모아 선물을 줄 것인가를 망설이면서 노래방 문을 연다.

전재경 자연환경국민신탁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