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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쁨] 부산시 수영구 광안2동 김용자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한달에 한번 해방둥이들이 만난다.

우린 어느덧 55세, 벌써 할머니로 불리는 친구들도 있다.

마주보는 서로의 모습에서 나이를 읽고 가끔씩 서글퍼지기도 한다.

밀양 조그마한 소도시를 고향으로 함께 그리며, 느끼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고향 사투리에 고향냄새와 소녀적 기억들이 묻어나는 포근한 내 친구들이다.

우리는 만나면 시끄럽다.

이야기의 주제도 순서도 없지만 서로서로 앞다퉈 얘기와 의견이 분분하다.

우린 언제부터인가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차 향기 그윽한 찻집의 분위기를 포기했다.

30, 40대의 분위기 있는 여성에 대한 미련은 버렸지만 우린 만나면 늙지 않았다고 큰소리친다.

지난번 만남에서 우린 늙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곱게 늙자고 했다.

그리고 학창시절에 외웠던 세계의 명시도 떠올렸다.

우리는 지금껏 저 산너머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오라 손짓하는 그런 무지개 같은 꿈을 좇아 걸어서 뛰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

그러나 우리의 찬란한 꿈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고. 여섯살 때 6.25를 만났고 중학교 3학년 꿈 많던 사춘기 시절에 4.19를 겪었으나 꿈 같은 역사로만 남았다.

우리가 태어나던 해는 그 이름도 찬란한 광복의 해였건만 그 이후 우린 그리 밝지만은 않은 역사를 지켜보며 살았다.

지금도 급변하는 주위의 모든 것들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신문이나 TV에 연일 오르내리는 밀레니엄.Y2K 등 생소한 낱말들이 우리들을 밀어내고 있다며 투덜대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들도 우리와 같은 꿈으로 그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들.딸.손자들도 그 꿈으로 우리의 뒤를 쫓아오리라. 쫓아오는 그 꿈길이 좀더 향기로운 길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아름답게 늙어가자고 다짐했다.

마음 밝고 넓게 가져 흐르는 세월 우리만 빠졌다는 생각 말고 해방둥이 할머니로서 2000년대를 함께 가기로 했다.

부산시 수영구 광안2동 김용자씨

◇ 협찬 = ㈜한국문화진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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