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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의 희망찾기] 7. 나닮은 아이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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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 나 닮은 아이 하나 기르지 못하고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아이가 없느냐?" "아이를 언제 가질 거냐?" 어머님도 친구들도 빨리 아이부터 낳으라고 재촉이다. 아이를 가지면 한 우주가 새로 열린다고, 원효도 간디도 아이를 낳았다고, 아이를 키워보기 전에는 인생을 모른다고 은근히 압력을 가한다. 이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참 곤혹스럽고 서글프다.

난들 왜 아이를 바라지 않겠는가.

지금 나에게 한 인간으로서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나 닮은 어린 것을 낳아 기르고픈 것인데. 나는 아이 손잡고 동네 목욕탕에 가서 보드라운 알몸을 비비며 씻어주고 싶다.

걸음마가 제법 늘 때쯤이면 등산길에 데리고 다니며 풀꽃과 나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내가 아침에 달리기 할 때는 자전거를 타고 내 곁에 따라 달리게 하고, 같이 길거리 농구도 하고 라이브 공연장에도 가고 싶다.

명절 때면 고향 선산 아버님 묘 앞에 나란히 절하고 할아버지.할머니로부터 이어져온 핏줄의 뿌리를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내가 다니던 학교와 공장과 수배시절 자취방과 감옥까지 함께 돌아보고 싶다.

내 삶의 역정과 시대의 열정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어깨동무하고 남은 길을 가고 싶다.

그런데 40대 중반에 들어선 나에게 왜 아이가 없는 건가.

군사독재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무참히 억누르던 시절이었다.

추석 때 고향엔 가야 하는데 보너스는커녕 석달째 월급이 안 나오는 거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계 스위치를 끄고 파업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사무실로 몰려가 체불 임금 지급하라고, 고향 갈 차비라도 달라고 항의했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우르르 경찰들이 쳐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몽둥이질을 해댔다.

"공돌이.공순이들이 어디서 까불어. " "이 불순분자 새끼들, 주동자 찾아내. " 구둣발로 짓밟고 머리채를 잡고 흔들고, 평소에 입바른 소리 잘하던 친구들과 나는 경찰서로 끌려갔다.

밤중까지 구타 속에 조사가 이어지고 자정이 넘어서야 지프차 바닥에 고개를 처박힌 채 어디론가 한동안 달려갔다.

나는 캄캄한 샛강 쓰레기장에 내던져졌다.

그리고선 섬뜩한 쇠붙이로 이마를 찍어누르며 협박했다.

"박기평 (필자의 본명) , 한번만 더 까불면 이대로 쏴버려, 니깟 공돌이 하나쯤 죽여 가지고 휴전선에 걸쳐놔 봤자 누가 눈이나 깜박할 줄 아나, 넌 임마 개죽음이야. "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나는 피멍든 몸을 추슬러 허청허청 둑방길로 올라섰다.

걷다 쓰러지다 울부짖다 하면서 새벽녘에야 기숙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날 밤길에서 나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면 주는 대로 받고 안주면 그냥 참고 살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인간이다.

우린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젠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죽음이 따라오는데…. 회사에서 쫓겨난 나는 성당에 앉아 소리없이 부르짖고 매달렸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죽음을 머리에 이고 매일 결단하며 살아가야만 했다.

첫 시집 '노동의 새벽' 을 내면서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시집을 발표하면 내 앞에는 수배와 구속, 어쩌면 의문사나 사형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 라는 말만 입에 올려도 '빨갱이' 로 몰리던 암담한 시대였으니, 경제성장의 주역이면서도 철저히 잊혀진 노동자의 존재, 그 노동현장의 분노와 꿈을 노래한 '노동의 새벽' 은 나오자마자 불온한 금서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얼굴없는 시인' 으로 쫓기기 시작했다.

그런 처지에서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아 기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예감할수록 나 닮은 아이를 남겨두고 싶은 인간의 본능은 더욱더 강렬히 솟구쳤다.

아내도 아이를 원하기는 했지만 봉제공장 미싱사로 잔업 철야에 시달리면서 하루하루 긴장된 현장 활동을 해나가자니 도저히 임신을 감당할 수 없었다.

마침내 나는 동원 예비군 훈련장에서 정관 수술을 하고 말았다.

그건 나를 온전히 세상에 바치겠다는 결단이었다.

80년대를 현장에서 열정으로 살아낸 친구들 중에 그렇게 정관수술을 한 사람이 많았다.

90년대 들어 군사독재의 끝이 보일 때쯤에야 그들은 묶었던 것을 다시 풀고 뒤늦게 아이를 낳느라 몸고생.마음고생을 겪어야 했다.

수배.감옥을 거쳐 13년만에 돌아와 보니 그 사이에 그 아이들이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한 인간에게 가장 위대한 창조물은 아이라고 하더니 아이를 그만큼 키워놓은 친구들이 정말 장해 보였다.

나는 친구를 쏙 빼닮은 아이를 안아보고 입맞추면서 그렇게 눈물겹고 신비할 수가 없었다.

아, 그래서였구나. 감옥에서 수인들이 결정적으로 절망할 때가 자기 아이를 잃어버렸을 때였는데. 파산을 하고 이혼까지 당하고 공직에서 쫓겨나도 어찌어찌 버텨내던 사람이 아이를 잃고 나서는 그만 생명의 불꽃이 퍽 꺼지듯 주저앉아버리는 거였다.

아이는 바로 자기 삶의 정수를 쏟아부은 '미래' 요 '부활' 이기에 그토록 소중한 것이리라. 친구 들이 모이면 자연스레 아이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갈수록 아이 키우기가 어렵고 무서운 세상이라며,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간절히 빌게 된다고 한다.

"아이야, 우리는 너무 무거운 시대의 짐을 지고 힘겹게 살았지만 너는 다르게 살아라. 너는 마음껏 누리고 마음껏 펼치고 멋지게 인생을 즐겨라. 이 엄마 아빠가 너의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마. " 내게는 아이가 없지만, 세상 모든 아이의 부모된 마음으로 나도 그렇게 손모아 기도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알면서도 건너뛰곤 한다.

우리가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재능 있게 기르려 해도 아이들은 자기 몫의 상처와 고통을 품을 수밖에 없는데. 아이들도 우리 못지 않게 무거운 자기시대의 과제를 타고나게 마련인데. 그렇다면 아이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시련과 역경이 오더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승화시켜갈 수 있는 자질을 물려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지식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 우리가 감당해야 할 우리 몫의 과제를 안고 다시 일어서는 삶 그 자체로 아이들에게 스며드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은 신부가 된 형님은 여섯살에 아버지를 여읜 내게 믿음직한 산이었다.

서울에서 고학 중이던 형이 방학 때 내려오면 의기소침해 있던 나에겐 생기가 돌았다.

천둥 번개가 치거나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형은 "기평아 나가자" 하면서 내 손을 꼭 잡고 고향 바닷가 방죽과 산등성이를 달리곤 했다.

번쩍 콰르르르 폭풍우가 쏟아지고 쌩쌩 눈보라가 치는 길을 형과 함께 뛰는 내 가슴은 그렇게 따습고 벅찰 수가 없었다.

감옥에서도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혼자라도 텅 빈 운동장을 철벅이며 달리곤 했다.

내 삶의 힘겨운 고비마다 어릴 적 손잡고 뛰어주던 그 사랑의 의미를 되살려내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나 닮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다 보면 아이 손을 잡고 길을 가거나 함께 달리고 있는 광경이 절로 떠오르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든다.

우리 다섯 남매를 이끌고 험난한 길을 헤쳐오신 홀어머님의 마지막 소원, 아이 하나만 낳으라는 바람을 차마 외면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스스로 정관을 묶었듯 아직은 벗을 수 없는 책임에 묶여 있다.

지금도 의문사당한 자식의 죽음을 밝히려는 유가족들이 땡볕 아래 울부짖고 있는데, 살아 돌아온 나는 부끄럽다.

엊그제는 서울역 앞 벤치에서 술취해 잠든 노숙자 곁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말을 걸어도 시무룩하던 그 아이의 똘망한 눈망울은 분명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얼마전 결식 아동들과 글쓰기 수업을 한 적이 있다.

수업 시간 내내 산만하던 아이들이 막상 수업이 끝나자 돌아가지 않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인을 받기 위해서라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사인 받는 노트에 적힌 일기와 시를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그 어린 것들이 배고프고 서러울 때마다 스스로 달래고 다짐하며 적어놓은 이야기들…. 50여명 아이들의 글을 하나하나 읽고 격려해 주는 동안 눈물을 감추느라고 얼마나 혼났던지. "시인 아저씨, 다음에 꼭 오실 거죠?" 하던 그 눈빛이 지금도 선연하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나에게 아이가 없더라도 더 많은 아이들을 위한 일에 내 온 힘을 쏟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닐까. 그리고 나같이 아이 없는 사람도 왕따당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이 그리 나쁘진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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