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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공부만 해라”… 선생님은 상담사·기사 그리고 ‘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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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고는 교실이 넉넉지 않아 방과후 수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 않다. 그러나 어떤 환경도 서상범 교사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과학실을 빌려 일본어 특강을 진행 중인 서 교사와 학생들. [황정옥 기자]


“민희, 너 이렇게 늦게 와서 언니처럼 서울대 갈 수 있겠어? 내일부턴 오전 7시까지 와서 공부해.” “형민이, 선생님이 언제부터 머리 깎으라고 그랬어? 용모가 단정해야 공부도 되는 거야.” 14일 오전 7시40분. 교문 앞에서 하나하나 잔소리를 해 가며 등교지도를 하는 서 교사는 전교생의 이름은 물론 개개인의 생활습관, 심지어 가족관계까지 꿰고 있었다.

잠을 잊은 학생 사랑

“지방에는 변변한 학원이 없잖아요. 학교에서 잡아주지 않으면 대부분의 학생이 공부와 멀어지게 돼요.” 서 교사가 2년 전 이 학교에 부임했을 때는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학생이 학급당 2~3명에 불과했다. 교통수단이 없어 자율학습이 오후 10시 넘어 끝나면 집에 갈 수 없다는 이유였다. 차로 30분씩 이상 걸리는 거리에 사는 학생들도 있었다. 부모님의 80% 이상이 농사를 짓거나 군인이기 때문에 통학을 시켜준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차가 없으면 선생님이 데려다 줄 테니, 모든 걸 선생님에게 맡기고 너희들은 공부만 하라’고 다독였죠.” 일단 학생들을 설득해 전원을 야간자율학습에 동참시켰다. 오후 10시까지는 무조건 학교에 남아 공부하도록 하고, 원하는 학생들은 자정까지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서 교사도 매일 자정까지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지켜봤다.

당시 최우선 과제는 학생들의 통학수단 확보였다. 화천군 관계자와 만나 학교상황을 설명하고 유류대 명목으로 800만원을 후원받았다. 자율방범대에 부탁해 일부 지역 학생들의 통학을 맡겼고, 집이 먼 학생들은 택시회사와 연계해 태워가도록 했다. 자정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은 서 교사가 직접 통학시켰다. 10여 명의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나면 오전 1시가 훌쩍 넘었다. 서 교사가 학교관사에 거주하는 이유다. 가족이 있는 춘천집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겨우 간다. “나는 은퇴하면 실컷 잘 수 있지만, 우리 애기들은 지금이 아니면 공부할 기회가 없어요.”

무보수로 일본어 과외에 특강까지

서 교사는 일본어 담당 교사다. 교내에서는 유일한 제2외국어 선생님이다. 자칫 학생들이 소홀하기 쉬운 과목. 그러나 그는 방과후 수업으로 일본어 특강까지 개설해 진행한다. 처음에는 주위로부터 “수능에서 중요한 과목도 아닌데 유난 떠는 것 아니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의 특기를 살리기에 제2외국어만큼 좋은 과목이 없다”는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사내고에 부임한 첫 해부터 서울대에 지망하는 고3 학생들을 불러 일본어 개인과외를 해왔다. 서 교사는 “정규 수업시간에 일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수업 내용만으로는 수능 일본어 시험에 대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오후 7시부터 매일 2시간 동안 시험에 나올 만한 문법사항을 체크하고, 예상문제를 직접 뽑아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물론 대가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2008년 서울대 인문계열에 합격한 정다희(20)씨는 “서울대에 가려면 한자나 제2외국어 중 하나는 반드시 해야 하는데, 주변에 전문 학원 하나 없어 걱정했었다”며 “선생님이 예상문제를 풀게 한 뒤 관련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준 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정씨는 수능에서 일본어 과목 1등급을 받았다.

지난해부터는 1~2학년까지 특강대상을 확대해 매주 2~3차례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고3 수업과는 달리 일본어능력시험(JLPT) 대비와 실용회화 위주로 특성화했다. 그 결과 올해 여름 치러진 JLPT 시험에서 김승범·박계훈(18·고3)군이 각각 1, 2급을 확보했다. 김군은 “특강 때문에 일본어에 관심을 가지게 돼 한국외국어대 일어과로 진학 목표를 정했다”고 말했다.

수월성 교육으로 새로운 도전

서 교사는 최근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시골학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수월성 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원도 얼마 되지 않는데, 수준이 다른 학생들에게 똑같은 내용만 가르치다 보면 하향 평준화가 될 수밖에 없거든요.” 사내고는 한 학년이라고 해봤자 2개 학급, 5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서 교사는 지난해 연구부장을 지내면서 ‘수준별 학습’을 근간으로 한 교과교실제 운영방안을 만들어 교육청에 제출했다. 이 학교는 올해 초 교과교실제 시범학교로 선정됐다.

올해는 우선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수학 수업을 수준에 따라 교실을 나눠 수업하고 있다. 2~3학년은 방과후 보충시간(오후 4시~5시30분)을 이용해 국어·영어·수학 과목 수준별 수업을 진행한다. 신동수 교장은 “웬만큼 공부한다는 아이들은 중학교 졸업 후 시내로 빠져나가 정원수급조차 힘들었는데, 교육환경이 좋아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서 선생이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시골학교지만, 서 교사는 벌써부터 입학사정관 전형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색 있는 학교 만들기’ 사업을 펼쳐 학생들과 함께 2주에 한번씩 인근 경로당 방문이나 문화재 보호활동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봉사활동의 중요성도 인식시키고 있는 것. 서 교사는 “작은 학교라서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작은 학교이기 때문에 더 큰 발전 가능성이 있다”며 “어느 학교에 있든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더 나은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최석호 기자, 사진=황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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