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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의 예술혼과 삶 그린 '천연기념물이…' 출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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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베토벤과 고야 그리고 김기창. 세계 예술사에서 청각장애를 딛고 일어선 불멸의 거장으로 흔히 베토벤과 고야를 얘기한다.

마흔이 넘어 청각을 잃은 베토벤은 교향곡 '합창' 과 '장엄미사' 를 작곡해 악성 (樂聖) 으로 추앙받고 있다.

고야 역시 46세에 청각마비를 겪지만 이를 극복하고 '성 안토니오 데 라 프로리다 성당의 천정화' '마야' 같은 명작을 남기며 근대 회화의 고봉으로 우뚝하다.

한국 화단의 거인 운보 (雲甫) 김기창 (金基昶.87) 이 한국예술사에서 가지는 의미 또한 그들 못지 않다.

세상이 무엇인지도 알기 전인 여섯의 나이에 소리를 잃어버리지만 믿기지 않는 의지로 한국 동양화의 전통적 정체성을 추구해 왔고 '바보산수' 란 독창적 영역을 개척한 운보. 특히 예술가로서의 성과 이전 한 인간으로 보여준 사랑과 헌신, 그리고 만년에 펼치고 있는 베푸는 삶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미술평론가 최병식 (경희대) 교수가 펴낸 '천연기념물이 된 바보' (동문선.7천8백원) 는 운보 선생의 일대기를 소설형식으로 쓴 평전으로 운보의 인간적인 매력과 삶의 굴곡을 깊이있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

이 평전은 당초 최교수가 '운보 김기창 예술론 연구' 란 작가론 논문을 집필하던 중 보다 부드러운 방식으로 작가의 삶에 접근하기 위해 쓴 작품으로 이달말쯤 그 논문도 출간 예정이다.

10년에 걸친 운보와의 대화, 3년이란 집필과정으로 마무리 된 이 평전은 운보의 일대기를 차분한 필체를 써 내리며 그칠 줄 모르는 예술혼, 아내와의 사랑과 갈등, 장애자를 위한 봉사정신 등 한 예술가의 온전한 모습을 다각도로 서술한다.

특히 이 평전은 소설 형식을 빌고 있어 운보의 예술과 삶을 깊이 있으면서도 쉽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특징. 문학소년이자 전국체전에 육상선수로 나갈 정도로 다재다능했지만 청각장애로 바보란 소릴 들어야 했던 소년 운보는 혼자 그림을 그리다 어머니 한윤명의 손을 잡고 이당 (以堂) 김은호 (金殷鎬) 사숙으로 들어가 화가로서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때 나이 17세였던 운보는 입문 1년만에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 발군의 실력을 보인다.

당시 서양화부에서 시인 이상이 입선한 것이 눈길을 끈다.

이후 화가로서 기반을 단단히 해가던 무렵 운보에게 운명같은 여인 박래현이 나타난다.

운보의 삶의 좌표를 흔들어 놓은 여인이자 한국 미술계에 한 획을 긋고 또 하나의 선구적 삶을 살아간 박래현. 지주의 딸이자 일본에서 활동하던 화가로 청각장애자이자 가난한 화가였던 운보와는 이뤄지기 어려운 사랑으로 비춰졌지만 그들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부가 된다.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그들의 사랑이었지만 서로 존중하는 '동지적 사랑' 의 모습은 눈물겹고 애뜻하다.

환갑이 넘어 아내를 먼저 보내고 힘든 나날을 보낸 운보. 오히려 그 슬픔은 그가 천진한 상태로 돌아가 사물의 크고 적음, 색채의 한계등을 벗어나 표현하는 작품세계인 '바보산수' 등을 개척하며 한국 화단의 거목으로 굳게 자리매김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 평전은 이러한 운보의 걸음걸음을 치밀한 묘사와 탄탄한 자료를 바탕으로 세세하게 그리고 있어 그가 얼마만큼 천연기념물적이고 바보 같은 인간이었으며 불멸의 예술가였는지를 비교적 가감없이 짚어내고 있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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