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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경제의식의 물갈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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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97년말 국가부도사태 직전까지 갔던 우리 경제가 뚜렷한 회복기미를 보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서민 장바구니에서부터 기업의 회계장부에 이르기까지 침체의 그늘은 아직도 짙은 것 같다.

작금의 경제난국은 겉으로는 환란 (換亂) 과 금융위기, 그리고 대기업의 연쇄부도 등으로 나타났지만 그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국제수지악화. 외채누적. 내수침체. 물가상승. 증시위축. 원화폭락. 기업수익악화. 고용불안 등 많은 문제가 함께 곪아터져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엄청난 경제 위기를 겪어야 했던 근본원인은 성장과정에서 요구되는 경제의 구조조정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경제 규모는 급히 팽창해 왔는데 경제 정책과 운용, 제도와 법규, 장치와 인프라 등이 이에 따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경제의 옷을 우리 몸에 맞게 진작 바꿔 입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큰 위기를 겪고 난 후 지금까지도 우리는 경제의 옷을 갈아 입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경제의 구조조정이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수십년 관행이 반복돼 굳을대로 굳어진 재벌경영.정부규제.금리구조.노동시장 등의 경직성은 고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들의 경직된 경제안목과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제의식의 물갈이를 이뤄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주장한다.

툭하면 정경유착.관치금융. 규제의 칼. 밥그릇 싸움 등으로 묘사돼 온 우리의 경제현실을 둘러 볼 때 그동안 우리의 경제의식이 얼마나 경직돼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금융개혁.재벌정책.공기업민영화 등 각종 경제정책의 수립과 운용과정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문제가 단기적.일시적 요인보다 장기적.구조적 요인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땜질식.일회용 반창고식의 임시변통 경제운용만을 거듭해 왔다.

겉으로는 규제혁파를 표방하면서도 정부의 투박한 손은 좀처럼 규제의 칼자루를 놓을 줄 몰랐다.

자율과 개방을 지향하는 자유시장경제에서 경제를 다루는 손은 정부의 큰 손, 무딘 손, 굳은 손이 아니라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어야 한다는 것이 안팎에서 증명돼 왔는데도, 우리 경제의 큰 줄거리는 계속 정부의 엄격한 관리 아래 운용돼 온 것이다.

얼마전 정부의 해외홍보자료를 보면 지난 93년 이래 우리 정부는 대규모로 규제를 철폐 또는 완화했다는 자랑섞인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아직도 얼마나 많은 규제가 남아 있을까 하는 걱정은 가시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규제의 칼이 아니라 칼처럼 냉정한 합리적.이성적 경제의식이다.

대기업이 무너지면 경제가 타격을 입는다.

그러나 실패한 경영이 물러나야 하는 것은 시장경제의 순리다.

그런데 지금껏 우리는 부실 대기업들의 처리를 놓고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고 있다.

수십 수백의 중소기업이 하루 아침에 쓰러져도 심드렁하기 십상인 우리들은 대기업이 무너질라 치면 범국민연합회까지 구성해 가며 반드시 살려야 한다면서 끈끈하고 감정적인 경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국가 기간산업을 이루는 대기업이 무너지면 안타깝고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외국인들이라고 팬암항공기가 사라지고, 제니스나 롤스로이스가 남의 손에 넘어갈 때 안타깝고 서운하지 않을까. 냉엄한 경제현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다시 짚어 보아야 할 때다.

이런 의미에서 비난의 화살은 정부에만 향할 수 없다.

기업인들의 경영자세, 개개인의 경제의식도 같이 지적받아야 한다.

구세대 경제의식에 찌들어 있는 우리는 아직도 정부의 눈치만 보고 시키는대로 할 뿐이다.

기업은 스스로 위험 택하기를 꺼리고 늘 정부에 기대려 한다.

정부는 간섭하지 말라고 떠들다가도 일이 조금만 빗나가면 기업도 개인도 정부의 보호책.육성책.부양책을 기대한다.

국내의 외국기업인들에 대한 조사 결과 가장 큰 문제점으로 'market understanding (시장파악)' 이라는 지적이 나왔는데 이 말은 한국 시장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장사하기가 어렵다는 그들의 고충을 나타내고 있지만, 역으로 보면 우리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겉으로는 시장경제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시장경제의 원리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도 된다.

경제의 물갈이를 위해서는 정치논리우선이라는 시대착오적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각국에서 작은 정부 만들기.민영화.자유화.개방화의 흐름을 타고 민간 부문이 계속 팽창하고 있고, 따라서 경제의 주도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제 시장 이외에는 그 누구도 경제를 효과적으로 규제할 수 없게 됐다.

정부지출. 차입. 통화. 금리.고용.조세정책 등이 시장경제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

과거 정치가 경제를 주무르던 상황에서 이제 경제가 정치를 움직이는 현실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빌 클린턴과 빌 게이츠 중 어느 빌이 더 센가" 하는 농담까지 나오고 있다.

정치의 물갈이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그 진정한 의미는 경제의 물갈이를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정치하는 사람들에게는 서운한 얘기지만 정치가 경제에 자리를 내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제 정치는 경제라는 주인공을 위해 단지 교통정리와 중재조정을 하는 조연의 기능만 담당해야 한다.

정치논리가 경제에 선행하는 구세대적 의식에서 벗어나 시장과 경쟁의 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경제의식으로 물갈이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경제는 언제까지나 경 (經) 제가 아니라 경 (硬) 제로 남을 것이고 그에 따른 엄청난 대가를 계속 치러야 할 것이다.

장석정 美일리노이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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