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해야지 (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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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6) 인내력 싸움

모든 일이 다 그러하듯 남북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남과 북 사이에는 서로 밀고 당기는 힘겨루기와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잇달아 발생하곤 했다.

1990년 서울 - 평양에서 열린 제1.2차 남북 총리회담과 그 2년후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 가 채택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더욱 그렇다.

비록 짧은 경험이지만 남북대화는 잘 되는듯 하다가도 막판에 뒤집어 지는 경우가 있고, 처음엔 꽉 막힌듯 보이다가 뜻밖에 탈출구가 생겨나기도 한다.

그래서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는 것이 남북대화' 라는 게 내 지론이다.

90년10월 제2차 남북 고위급 회담 (평양) 때 일이다.

나의 카운터파트인 연형묵 총리가 '긴급 현안문제를 제기하겠다' 며 정색을 하고 나섰다.

그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남조선은 유엔 동시가입이라는 민족 분열적 책동을 중지하고 주한미군은 침략적 성격의 군사훈련을 즉각 중단하라' 는 것이었다.

나는 총리회담을 앞두고 내 나름의 세 가지 원칙을 정했었다.

즉 '북한이 어떻게 나오든 성심성의껏 대하자. 북한이 공작적 차원에서 회담을 이용하려 할지라도 평화공존 관계 수립이라는 정도 (正道) 를 걷자. 북한이 무례한 발언을 할 경우 우리 입장을 당당하게 밝히자' 는 것 등이 그것이었다.

그런 상황인지라 나도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렇게 반박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남북한 평화공존과 번영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회담에 임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나오면 정말 곤란하다.

정작 문제의 핵심은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 노선이다.

남북간에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구축하려면 대남 혁명노선부터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 ' 그러자 연형묵은 순간 멍한 표정이었다.

내가 이처럼 강하게 맞받아 치고 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것 같았다.

이때 연형묵에게 쪽지 하나가 전달됐다.

이를 본 그는 "이런 분위기에서는 도저히 회담을 계속할 수 없소" 하며 소리를 지르고는 회담장을 나가 버렸다.

회담은 자동 정회가 되고 말았다.

이런 일들은 비단 그때 뿐만 아니라 남북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계속 되곤 했다.

그것은 어쩌면 남북한이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고위급 회담을 갖기로 합의한 순간부터 예고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북 고위급 회담에 관한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88년 12월, 그러니까 내가 국무총리로 임명된 직후였다.

그때 나는 '정치.군사회담과 교류.협력이라는 두 가지 의제를 하나로 묶어 북측에 총리회담을 제의하라' 고 내각에 지시했었다.

이에대해 북한은 3주일 후인 89년 1월16일 연형묵 총리 명의로 한 통의 전통문 (전화통지문) 을 보내 왔다.

'다소 불만스런 점이 있지만 남북고위급회담 제의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는 요지였다.

지리한 줄다리기와 신경전은 바로 이때부터 전개되기 시작했다.

고위급 회담 추진과정에서 첫번째 장애물은 회담명칭과 의제였다.

우선 명칭에 대해 남측은 '남북고위 당국자회담' 을, 북측은 '북남고위급정치.군사회담' 을 각각 주장하고 나섰다.

회담 의제에 관해서도 남측은 ^상호비방.중상중지 ^상호존중및 불간섭 ^다각적 교류.협력 ^군사적 신뢰구축 ^남북정상회담 ^기타 문제 등 6개항을 제시했다.

반면 북측은 '북남 사이의 당면한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할 데 대하여' 라는 단일의제를 들고 나왔다.

한마디로 우리측이 '先교류협력, 後정치.군사문제 논의' 라는 단계적인 접근방식을 제시한 데 반해 북측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타결짓는, 말하자면 '정치적 빅딜' 을 주장했다.

결국 회담 명칭과 의제문제는 무려 8차례의 예비회담 끝에 1년 7개월만에야 최종 합의를 보게 됐다.

회담명칭은 '남북고위급회담' 으로, 의제는 '남북간의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다각적인 교류.협력 실시문제' 로 양측이 절충함으로써 가까스로 합의를 이뤄낸 것이다.

바로 이런 식의 산고 (産苦) 는 그후에도 무수히 많았다.

글= 강영훈 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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