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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429.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제9장 갯벌⑭

"형, 춥지 않아?" 태호가 옆에 서 있었다. 머쓱해진 사내는 벌써 시선을 돌려버렸다.

"꽁지에 불 붙은 놈 메치로 들락거리드이, 니 사무 어디 숨었다가 인제 나타나노? 뭐가 잘못된 기라도 있었나?" "숨지도 않았고, 잘못된 것도 없어. 정보수집하러 다녔지." "정보라 카면 조여사한테 이틀 동안이나 수업받았으면 됐지, 또 무신 정보수집이고."

"같은 말이라도 여러 곳에서 들어보면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생각을 달리 가질 수도 있잖아. 보따리 장수 땡쳤다는 조여사의 말은 흰소리가 아닌 것 같아. 게다가 말이 통한다고 조선족 중개상과 거래했다가 전재산 몽땅 날린 사람도 만나봤어. 전세금 빼고 퇴직금조차 달달 긁어서 대련에다 조선족 명의로 그럴싸한 점포 하나를 구입했었는데, 서울 다니러간 사이에 그 작자가 점포를 팔아서 흔적도 없이 날아버린 모양이야. 법적으로는 조선족이 엄연히 점포임자였으니 중국 공안 당국에 고발을 해도 범죄로 성립될 턱이 없고, 당사자가 나서서 찾는다해도 미국보다 더 넓은 땅덩어리 어디 숨어 있는지 알게 뭐야. 깨끗하게 날리고 지금은 우리처럼 짐꾼행세로 연명하고 있다는 얘길 들었어. 행여나 그 작자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 때문인 것 같은데, 바보 온달이나 할 짓이지. "

"바보 온달이 아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해 바닷바람에 중독된 기라. 중국 보따리 장사 파장 무렵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들리는 소리마다 믿을 데라고는 내 한사람뿐이라는 섭섭한 소리뿐인데, 내를 내가 믿어봤자 또 무슨 여망이 있겠노?"

"반드시 틈새시장이라는 게 있을거야. 그게 뭔지 찾아내야 돼. 부피는 크지 않지만, 수량은 많은 것. 그리고 중국에선 수요가 달리는 것. 몸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고 머리를 써야 땡시장에서도 살아남을거야. 우선 한국 사람들이 무더기로 드나드는 대련.청도.단동을 우리도 남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드나들어야 할까? 그게 바로 남이 간다고 거름 지고 장에 가는 꼴이겠지. 새로운 장터를 개발하는 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생각해보면 분명 길이 찾아질거야. 중국은 커. 중국이 큰 나라라는 걸 염두에 둘 필요가 있어. 대련이나 위해나 청도는 벌써 패션타운이나 보세창고 같은 대형상가들이 떡 벌어지게 들어찬 지 오래됐고 숫자도 불어나고 있는가 봐. 주막집 강아지처럼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 짐꾼으로 날새우려면 몰라도 이제 보따리들은 발 붙일 틈새조차 없어졌다는 거야. "

"니 말이 이빨은 대충 맞는 것 같다. 위하라는 곳도 중국 땅이 분명하고 대련이라 카는 곳도 엄연한 중국땅인데, 거기서 한국 자장면 파는 식당이 처깔랬다카면 벌써 단물은 어느 놈이 다 빨아 먹고 껍데기만 남았다는 말 아니겠나. 그리고 니가 말하는 틈새시장이라 카는 것도 새겨 들어보면, 호랭이한테 물래가도 정신만 채리면 살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나.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한 기라. 이번 걸음에 가서 시장조사해 보고 보따리 미고 (메고) 다녀봤자 가망이 없다 카면 미련 없이 인천으로 빠구해버리면 될꺼 아이가. 돌아가면 산골로 쫓게 댕기면서 살아가지 뭐.

그것도 안되면 들어가서 몇 달 빵살이하고 나오지 뭐. 벌써부터 기가 죽어서 얼살맞은 고기메치로 비실거릴 까닭이 없는기라. 조여사가 우리를 너무 기죽여뿌린 거 아이가? 그리고 조선족에게 전재산 몽땅 날렸다는 이바구도 사람나름 아니겠나. 이백만이나 된다카는 조선족 중에는 시기꾼도 있을 끼고 도둑놈도 있기 마련인기라, 거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면 백주 대낮에 남의 눈알 빼서 달아나는 날강도는 없겠나? 한국에는 지 에미 애비를 칼로 찔러 죽이는 천하에 몹쓸놈도 있잖나. 모두가 지가 처신할 탓인기라. 전직 대통령 말마따나 어느 날 문득 색맹이 돼뿌러서 사람 잘못 알아봤던 지탓으로 돌린다 카면 몰라도 백프로 남의 탓으로 돌리면 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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