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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오늘, 국민 앞에 서는 정운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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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오늘 한국 사회는 또 하나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한국 최고의 지성(知性)이라 할 수 있는 서울대 총장 출신이 국회 인사청문회에 서는 것이다. 정운찬 총리후보자의 청문회는 그래서 다른 청문회하고는 또 다르다. 국민의 대리인이 던지는 칼에 후보자가 무참히 쓰러져 버리면 일반인의 감정은 참으로 착잡할 것이다. 그는 한국 최고의 인재들이 모였다는 서울대의 총장이었으며 교수들이 직선으로 뽑았다는 지성의 리더다. 그런 사람이 병역이 어떻고 논문이 어떠하며 탈세가 어떻고 위장전입이 어떠했다는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버리면 이는 한국 지성의 창피요, 자존심의 괴멸이 될 것이다.

혹자는 대학총장이라고, 서울대 총장이라고 왜 특별히 주목해야 하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요즘의 대학총장은 지성(知性)보다는 모금 능력과 인기가 좌우한다는데 서울대 총장이라고 왜 각별해야 하느냐고 따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대학총장은 지성의 표상(表象)이자 상아탑의 리더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정권이 총장을 총리로 기용한 것 아닌가. 5공의 전두환 대통령은 정통성 공격에 시달리다가 이를 막으려는 방패로 김상협 고려대 총장을 영입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초대 총리로 서울대 총장을 지낸 이현재씨를 발탁했고 마지막 총리로는 현승종 전 성균관대 총장을 택했다. 장관·장군·법관에게서 찾을 수 없는 뭔가 형이상학적 이미지가 총장에겐 있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 후보자를 고른 건 꼭 그런 이미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인(世人)의 눈에는 정운찬은 서울대 총장이다. 서울대 총장이기 때문에 그는 2년 전 대통령에 출마하려 했고 그가 서울대 총장이었기 때문에 2년 전의 정운찬을 국민은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운찬 청문회는 사상 처음으로 서울대 총장 청문회가 되어 버렸고 여타와는 다른 독특한 청문회인 것이다.

사상 초유의 서울대 총장 청문회가 비상한 국면으로 흐르고 있다. 한국 최고의 지성답게 도덕적 하자가 없으면 좋으련만 불행하게도 그의 앞에는 이미 도덕성 문제라는 시뻘건 격류가 흐르고 있다. 소득 수천만원을 신고해야 하는 걸 명성 있는 경제학자가 몰랐다면 이 사회에선 도대체 누가 알아야 한단 말인가. 학문의 길을 걷기로 하면서 미국 대학원 원서에 병역을 ‘면제’라고 거짓으로 썼다는 건 무슨 말인가. 선진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도 왜 논문 게재에 있어선 선진문화를 따르지 않는가. 부인의 위장전입은 무엇 때문이었나.

정운찬에게는 선택이 없다. 강을 건너려면 격류에 뛰어들어 헤엄쳐야 한다. 그런데 그 영법(泳法)이 서울대 총장이자 최고 지성다웠으면 좋겠다. “세무 대리인이 신고해 나는 몰랐다”거나 “법적으론 문제가 없는 일”이며 “영문으로 바꿔 쓰는 건 통상 있는 일”이라는 설명이라면, 그는 서울대 총장이 아니라 변호사다. 서울대 총장은 지도층의 가장 상징적인 사람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의무)의 기수(旗手)여야 한다. 정 후보자보다 머리가 뛰어나지 못하고 배우지도 못했고 가진 것이 없는 많은 이가 도덕적 하자 없이 이 세상을 살아 나가고 있다. 그들이 저지르는 실수란 신호위반이나 쥐꼬리만한 탈세(노점상)가 고작이다.

정 후보자는 깨끗이 시인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러곤 부채상환 계획을 내놓아야 한다. 사회에 진 도덕적 빚을 공직을 통해 어떻게 갚아 나갈지 밝혀야 한다. 그가 좋아하는 경제학자 마셜은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강조했다. 정 후보자는 머리와 가슴을 사회에 어떻게 내놓을지 말해야 한다. 그러곤 조용히 여론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는 과반수 한나라당의 힘으로 총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반성과 결의’에서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그는 대통령의 총리일 뿐 국민의 총리는 아니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